분노와 탐심
근사록(近思錄)에 이르기를 “분노(憤怒)하는 마음을 타는 불 끄듯이 하고, 욕심(慾心)을 자제하기를 물을 막듯이 막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近思錄에 云, 徵忿을 如救火하고, 窒慾을 如防水하라.>‘ 이 구절은 인간의 감정 중 가장 경계하고 절제하여야할 것이 바로 분노하는 것과 욕심 나아가 탐심(貪心)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1. 노(怒)함과 온유(溫柔)함
명심보감(明心寶鑑) 정기편(正己篇)에 이르기를 “ 채백개가 말하기를,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것은 마음속에 있고 말은 입에서 나오는 것이니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蔡伯皆(채백개) 曰(왈) 喜怒(희노)는 在心(재심)하고 言出於口(언출어구)하니 不可不愼(불가불신)이니라.>”고 하였다.
하루에도 열두 번 변하는 게 사람 마음이라고 한다. 회로애락의 감정이 없으면 인생은 매우 건조해질 것이다. 사랑을 속삭이고 불의에 분노하며 우정과 평화를 노래하게 하는 힘이 바로 감정이다. 그러나 감정은 불행과 혼란을 부르기도 한다. 사소한 일에서 비롯된 증오와 복수심이 상대방과 자신의 파멸을 가져오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동서고금을 통해 사람의 감정이 수행의 첫째 대상으로 꼽힌 이유가 이 때문일 것이다.
병중에 가장 큰 병이 화병(火病)이라고 한다. 가슴 속에서 불이 나고 화가 치미는 병으로 어떤 약으로도 치료가 쉽지 않은 병이다. 오직 치료약이 있다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 밖에는 없다. 분노는 상대방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일 뿐이다. 내 가슴 안에서 폭발하는 분노는 오랫동안 나와 타인에게 상처를 입혀 회복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분노는 인생을 힘들게 만드는 가장 큰 고질병이다. (중국철학자 박재희)
백강 이경여 선생은 효종대왕에게 노(怒)한 감정을 절제할 것을 크게 강조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효종 8년(1657) 5월 5일에 백강상국이 상차(上箚)하기를 “전하께서는 노한 감정을 절제하지 않습니다. ~ 노한 감정을 절제하지 않으면 벌(罰)에서 당연한 원칙을 잃게 됩니다. 이 때문에 아랫사람들이 기가 죽어 물러나 귀에 거슬리는 바른 말이 날로 전하에게서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 대간(臺諫)의 직책은 우리 조종조로부터 예의로써 대우하여 왔습니다. 임금이 먼저 각별한 은혜와 예의로 대우하여 백관들이 모두 그 위세에 눌림으로써 공론(公論)를 주장하고 기강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 소나 말을 속박하듯이 자신의 귀와 눈을 못쓰게 해서야 되겠습니까.”고 하였다.
백강상국은 죽음을 앞둔 효종 8년 8월8일 마지막 유차(遺箚)에서조차 강조하기를 “ ~ 오직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기뻐하거나 성내는 것을 경계하고 편견을 끊으시며 착한 사람을 가까이 하고 백성의 힘을 양성하여 원대한 업을 공고하게 다져 죽음을 눈앞에 둔 신하의 소원에 부응해 주소서.”하였다.
“小學”에는 갑작스런 분노에 대하여 이렇게 경계하고 있다. ‘관직에 있는 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은 갑작스런 분노다(當官者는 必以暴怒爲戒라!). 만약 아랫사람이 일처리 못마땅한 것이 있다면(事有不可어든), 마땅히 자세히 일을 살펴서 대처해야 한다(當詳處之라). 그러면 어떤 일이든 사리에 적중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必無不中이라!). 만약 책임자가 먼저 갑작스런 분노를 표출한다면(若先暴怒면) 이것은 다만 자신에게 손해가 될 뿐이다(只能自害라!).’ 또한 붓다는 ‘화’에 대해 말하기를 “화를 벌컥 내는 건 불타는 석탄 한 덩이를 손에 꽉 쥐는 것과도 같다. 상대방에게 던지기 전 불에 데는 사람은 그 자신이다”라고 하였다 (틱닛한 스님의 저서 “화”중에서).
사실 분노를 포함한 인간의 감정 그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기에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있을 수 있다. 다만 그것이 때를 잃고 명분을 잃었을 때 중용의 원칙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중국 자금성이나 덕수궁에는 중화전(中和殿)이 있다. 중화(中和)는 군왕이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조절해야 한다는 경계의 뜻을 갖고 있다. 다음은 중용에 나오는 중화(中和)의 의미이다. ‘희노애락의 감정이 가슴 속에서 표출 되지 않았을 때를 중(中)의 상태라 한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그것이 밖으로 적절히 표출되어 원칙에 맞을 때를 화(和)의 상태라고 한다(發而皆中節 謂之和). 중화(中和)는 군왕이 천하를 다스리는 대본(大本)이며 천하를 통치하는 달도(達道)인 것이다(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니라).’ 기쁨과 분노, 슬픔과 즐거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적절히 표출되었을 때 오히려 중화(中和)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기쁨과 즐거움이 지나치면 음란해지고, 슬픔과 분노가 지나치면 상처가 난다. 그래서 너무 기쁜 것이나, 너무 슬픈 것이나 인간에게는 씻을 수 없는 후유증을 남긴다. 적절한 분노는 오히려 조직을 긴장시키고 자신을 생존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제임스 도브슨(James Dobson)은 성공적인 결혼이란 충돌이나 분노가 없는 결혼이 아니며, 이러한 분노나 충돌을 어떻게 잘 풀어가는 가를 익힐 수 있는 결혼이라고 하였다. “채근담”에 기억할 만한 구절이 있다. 즉 “남의 거짓을 알아도 말하지 않고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해도 얼굴빛을 움직이지 않으면 그 속에 깊은 뜻이 있고 또한 끝없는 수용(受用)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분노를 스스로 다스리고 절제하여 나아가 극복 할 수가 있을까?
송(宋)나라 정이(程頤)가 말하기를 ‘사람의 감정 중에 쉽게 폭발하여 가장 억누르기 어려운 것은 성내는 것이다. 그러나 화가 날 때에 문득 그 노여움을 잊고 이치의 옳고 그름을 관찰하면, 밖에서의 유혹은 두려울 것이 없게 된다. 이쯤 되면 도(道)의 경지가 반절은 넘어간 것이다.’ 하였고, 사양좌(謝良佐)는 말하기를 ‘극기(克己) 공부는 모쪼록 성품이 편벽되어 이기기 어려운 곳을 향해 이겨 나가야 된다.’ 하였습니다. 여조겸(呂祖謙)은 젊었을 때 성품이 거칠고 사나웠는데, 《논어(論語)》를 보다가 ‘자신의 잘못은 스스로 두텁게 책망하고 남에게는 적게 책망한다.’는 데에 이르러 홀연히 깨달음을 얻어 생각이 일시에 평탄해져서 죽을 때까지 이런 병통이 없었습니다. “다시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분한 생각을 징계하는 데 더욱 뜻을 두소서.”-인조 9년, 1631.10. 3. 백강 이경여 선생 上箚文 중에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BC 4 ~ AD 65)는 그의 저서 ‘화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화를 어떻게 가라앉힐까에 대한 최고의 치료법은 “화가 치솟을 때 당신의 험한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라”라고 조언하였다. 이는 스스로에게 잠시 멈추라고 타이를 수 있는 절제의 힘이다. 플라톤이 그렇게 했다. 플라톤은 자신의 노예 한명이 큰 실수를 저지르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당장 윗옷을 벗고 등짝을 대라고 명했다. 직접 채찍질을 하려고 채찍을 번쩍 치켜든 순간, 플라톤은 자신의 흉한 모습을 깨달았다. 후려치지도 않고, 내리지도 않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한참 서있었다. 지나가던 친구가 “당신 뭐해?”라고 물어봤다. 플라톤의 답이 걸작이다. “화를 내고 있는 나 스스로를 벌주는 거라네“. 세네카는 또 조언하기를 화가 나면 ’그저 조금 뒤로 물러나 껄껄 웃어라‘고도 하였다.
이에 대한 성경의 처방은 온유(溫柔, gentle)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는 자기 스스로의 힘만으로 화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성령(Holy Spirit)충만을 받게 됨으로부터 이루어가는 것이다. 동행하는 친구인 예수그리스도와의 만남과 대화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과정에서 그 길을 발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 스스로의 힘과 노력만으로는 이 높은 경지에 온전히 이를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오랜 경험의 결론이다.
성경에서는 화를 잘 내는 성질을 극복하는 길로 제시하는 것이 온유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며, 이는 성령이 충만하여짐이 가져오는 주요한 열매이다. 온유함은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영(靈)으로 충만하여 자신의 내부로부터 분출하는 힘, 에너지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온유한 사람들은 겸손하고 부드러울 뿐 아니라 인내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그들은 길이 참는다. 그들은 일곱 번 용서할 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한다 (마태복음 18장22절). 온유한 사람은 다른 누가 그들에게 잘못하였을 때 종종 그 사람이 용서가 필요한 만행을 저지른 것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그 사람의 잘못된 행동을 그들에 대한 모욕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그 사람이 잘 모르고 실수한 것이므로 그것에 대해 화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온유한 사람은 그들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대할 때 마치 그 사람이 그들에게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것처럼 기꺼이 친절하게 대한다.
물론 온유한 사람들도 잠시 화를 낼 수 있겠지만, 그들은 화를 내어도 죄를 짓지 않는다. 그들은 악령(惡靈)를 향해 전적으로 화를 내지, 그들에게 잘못을 한 사람을 대상으로 화를 내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상상할 수없는 십자가 고통을 우리에 대한 아가페의 사랑으로 이겨내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평안을 얻으리니 (마태복음 11장29절).“ 이러한 예수도 하나님의 성전에서 상행위를 하여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에게 화를 낸 적이 있으며, 우리들도 사랑하기 때문에 오히려 깊은 관심에서 화를 낼 수도 있다. 화를 내는 것 그 자체는 죄가 아니다. 다만 화가 우리를 파괴적인 행동으로 몰아갈 때에 죄가 되는 것이다.
온유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도 천성적으로 불같이 격한 성격을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들의 성급한 기질을 계속 죽이며 살아간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체질 자체가 원래 그렇게 생겨먹어서 어쩔 수 없어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악한 체질을 교정하고 타락한 본성을 죽일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 스펄젼(C.H.Spulgeon)의 “내가 너를 축복한다”, 중에서
우리는 화를 조정하고 절제하여 극복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 우리들이 다른 사람과 심히 다투어 언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전화가 오면 우리는 분노를 절제하고 전화를 받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분노를 절제할 수가 있다.
성경은 급히 화를 내지 말라고 말한다. "급하게 화내지 말라. 분노는 어리석은 사람의 품에 머무는 것이다 ~ 전도서 7장9절“ "사랑은 쉽게 화를 내지 아니 합니다 ~ 고린도 전서 13장5절.” 일단 물러서서 돌아보자. "미련한 사람은 화를 있는 대로 다 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화가 나도 참는다 ~ 잠언 29장11절.” 화가 났을 때 즉각 충동적인 반응은 자제하기 바란다. 하루 종일 자제하라는 것이 아니라 한 5분정도 시간을 가지고 한발자국 물러서서 두루 돌아보기 바란다. 미국독립선언서의 작가인 토마스 제퍼슨은 말하기를 화가 나면 말하기 전에 열을 세고, 매우 화가 나면 말하기 전에 백을 세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시간동안에 내가 왜 화가 났는지, 내가 정말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또 그를 얻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바란다. 이를 통하여 화를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화를 잘 절제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하자. "성급한 사람과 사귀지 말고, 성을 잘 내는 사람과 함께 다니지 마라. 네가 그 행위를 본받아서 그 올무에 걸려들까 염려된다. ~ 잠언 22장24~25절.“ 화를 내는 것도 전염성이 있다. 큰 소리로 떠드는 자 들같이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목소리도 커지게 된다. 그러므로 분노를 잘 다루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습관이 필요한 것이다.
"화가 나면, 이로 인하여 죄악으로 빠지지 말도록 하라 ~ 에베소서 4장26절.” 화가 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며, 화가 난 것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것이 죄이다. 문제는 이를 잘 풀어내어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아니하도록 하는 것이다. 화가 나는 것 자체가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며, 그 이면에는 상처, 두려움, 좌절감등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 시간을 가지고 돌아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원인을 스스로 이해하게 될 때에 우리는 화로 인하여 파괴적인 행태를 일으켜 결국은 죄에 이르지 않게 하는 방법들을 찾아 갈 수가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사랑으로 십자가의 극심한 고난의 길을 택한 바를 생각하며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자 할 때에, 사사롭게 분노하여 파괴적으로 나가 죄악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2. 탐심(貪心)과 절제(節制)
“삼가 모든 탐심(貪心. greed)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 누가복음 12장15절.
청빈(淸貧)을 좋아하는 삶은 사람의 마음과 영혼을 맑게 함으로 오히려 진리와 하나님을 만나는 길에 올바로 들어서게 한다.
돈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더욱 좋다. 왜냐하면 많은 돈을 관리하자면 계속 신경을 써야하고 도둑 걱정도 해야 하고 또 많은 돈은 그로 인해 일가친척들 간의 분란의 원인이 되기도 하며 자녀들의 일생을 망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치함과 호화로운 것은 여러 가지 악(惡)의 근본이요, 모든 값진 장식품도 역시 좋은 뜻을 손상시키며 백가지 구경을 좋아하는 것 역시 뜻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재물보다 의리(義理)를 좋아하라. 견득사의(見得思義) 하라 즉 재물을 보게 되면 그것이 정당한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라” ~ 백강 이경여 선생 가훈에서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 잠언 30장8-9절
“천지(天地)간의 만물에는 저마다의 분한(分限)이 있으니 분한 밖에 지나치게 바라서는 아니 된다. 마구 써서 없애는 것이 많고 보면 하늘의 죄를 얻게 된다“ ~ 백강 이경여 선생의 1653년 7월 효종대왕에게 말씀한 상차문(上箚文)에서
돈이 주는 행복감은 일시적이어서 불안과 염려를 더할 뿐이며 사람이 돈에 지나치게 집착할 때에는 오히려 죄의 강(江)으로 쓸려 들어가 결국 파멸을 자초하게 되는 것이다. “부(富)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迷惑)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럿도다” ~ 디모데전서 6장9-10절.
존 밀턴의 ‘실락원’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하나님을 배신한 천사가 마귀 왕이 되고 그의 군사가 천사장 가브리엘의 군사와 싸워 패하여 땅으로 쫓겨나 바닷가 갯벌에 쳐 박혔다. 마귀 왕이 얼마 후 정신을 차리고 땅에서 살아갈 방도를 생각해 냈는데, 그것이 곧 이 땅에 돈의 신인 맘몬(Mammon)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널리 퍼진 황금만능주의는 바로 이 맘몬의 왕국인 것이다. 고로 돈을 신처럼 섬기는 것은 바로 마귀 왕을 섬기는 것과 같다는 의미로 매우 조심하라는 것이다.
만족함을 알면 가히 즐거울 것이요 탐욕스러움에 힘을 쓰면 곧 근심이 되느니라. (知足可樂 務貪則優) ~ 명심보감 안분편에서, 나아가 안분낙도(安分樂道)하라, 즉 하늘이 준 자기의 분수를 알고 지키며 하나님의 도(道)를 실행함을 즐거워하라.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富饒)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 누가복음 12장20-21절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에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는 일이 없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가지도 못한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나라” ~ 마태복음 6장20-21절. 마음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데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집중하고 살아가니, 그는 이 땅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고 내세에서 천국에 들어가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재물을 아무리 많이 쌓아 놓은들 죽을 때는 빈손으로 가며 남긴 재물이 자손들의 인생을 망치기도 하니 참으로 조심할지어다. 세상에서 얻은 재물은 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내게 잠시 맡겨둔 것이니 그의 뜻에 맡게 모두 사회를 위해 환원하고 사용하라. 이것이 오늘날 미국 스웨덴 독일 등 청교도 국가들이 가장 잘사는 복지의 나라가 되는 주요한 이유이다.
인조 12년(1634년) 백강 이경여 선생의 상차문에는 다음의 귀절이 있어, 사치를 배격하고 검소를 중시함이 지극하였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사치의 화는 천재보다도 심하다.’고 하였습니다. 백성을 상하게 하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으로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다스림을 도모하는 임금치고 검약을 숭상하는 것을 먼저하지 않은 임금이 없으며, 위란을 불러온 임금치고 역시 사치를 극도로 하여 자신을 망치지 않은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앞장서서 이끌어서 만회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계십니다. 반정한 처음에는 여련(輿輦)과 의복의 꾸밈에 있어서 오히려 지난날의 제도를 보존하였으며, 중년 이래로는 완호(玩好)하는 물건과 기교한 기예에 대해서도 자못 뜻을 두고 계십니다. 그리고 국혼(國婚)의 사치스러움과 제택의 화려함은 이미 의로운 방도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선왕의 법제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지나간 것은 돌이킬 수 없으나 오는 것은 경계할 수 있습니다. 금옥(金玉)과 금수(錦繡)의 꾸밈은 궁중에서 금지시키고 검은 명주와 베 휘장의 검소함을 먼저 성상께서 시행하여 모범을 보이시면, 백성들을 교화시켜 따르게 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2022. 1. 9. 素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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