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의 구분을 밝히는 것으로 정심(正心)을 삼고
병자호란 이후, 계사년(1653, 효종4) 여름, 강릉(江陵)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는 이변이 일어나자, 상이 신하들을 불러 재이를 막을 대책을 물었다. 청나라의 압력으로 영상에서 물러나 영중추부사로 있던 백강 이경여 선생이 부름을 받고 입대하여 다스림의 요체를 힘써 진달하고, 또 공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동요시키는 폐단을 언급하였다.
물러난 뒤에 급하게 들어와 뵙느라 미처 다 아뢰지 못한 것을 마침내 수천 글자의 차자를 올려 조목조목 진달하였다. 내용은 성심(聖心)ㆍ성학(聖學)ㆍ제가(齊家)ㆍ효우(孝友), 종친을 도탑게 하는 일[惇宗], 정승의 임명[任相], 간언을 받아들이는 일[納諫], 성심을 확장하는 일[推誠], 아랫사람을 예로 대하는 일[禮下], 애민(愛民), 정무에 근면할 것[勤政]과 기강을 세우고[立紀網] 명기를 중히 여기고[重名器] 붕당을 없애고[去朋黨] 아첨을 멀리하고[遠讒佞] 형옥을 삼가고[恤刑獄] 교화를 밝히고[明敎化] 인재를 양성하고[養人才] 병정을 닦고[修兵政] 절검을 숭상하고[崇節儉] 신의를 중히 여기는 것[重信義]이었다.
그 내용은 천리와 인욕의 구분을 밝히는 것으로 정심(正心)을 삼고, 몸을 반성하여 의리의 당연함을 구하고 사안을 참고하여 득실의 계기를 징험하는 것을 강학(講學)의 요체로 삼았다.
제가(齊家)는 절검을 숭상하고 궁궐 안팎을 엄히 다스리려는 것이며, 종친을 도탑게 하는 일은 은혜와 의리를 돈독히 하되 사치하고 횡포를 부리는 습관을 방지하려는 것이었으며, 간언을 받아들이고 성심을 다해야 한다고 말한 부분에서 더욱 정성을 쏟아 피력하였다.
애민(愛民)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은혜를 베푸는 정사는 위에서 하는 것이기는 하나 봉행하는 책임은 실로 백성을 기르는 수령에게 달려 있습니다. 한 선제(漢宣帝)는 2천 석(二千石)이 나와 함께 다스린다 하였고 당 태종(唐太宗)은 영장(令長)의 이름을 병풍에 써 두고 늘 보았으니, 백성을 사랑하는 요체를 알았다 하겠습니다. 더구나 대읍(大邑)과 대도(大都)는 나라를 보호하는 곳입니다. 이를테면 호남(湖南)의 전주(全州)ㆍ나주(羅州)ㆍ영암(靈巖)ㆍ남원(南原)과, 호서(湖西)의 충주(忠州)ㆍ청주(淸州)ㆍ공주(公州)ㆍ홍주(洪州)와, 영남(嶺南)의 경주(慶州)ㆍ상주(尙州)ㆍ진주(晉州)ㆍ안동(安東)과, 기타 여러 도에는 각각 사무가 많은 요충지가 있으니, 적임자가 아니면 백성이 피해를 받을 뿐더러 불행히 변란이 있을 경우 어디를 의지하고 믿겠습니까. 이는 더욱 신중히 선임해야 할 것입니다.”
정무를 근면히 할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늘의 운행은 씩씩하여 쉬지 않는데 이를 체득해야 하는 임금이 조금이라도 끊어짐이 있으면 모든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 문왕(周文王)은 해가 기울 때까지 밥 먹을 겨를이 없었고, 상 탕왕(商湯王)은 어둑한 새벽에서부터 덕을 크게 밝힌 것이 어찌 의미 없는 일이겠습니까. 조무(趙武)가 진(晉)나라의 경(卿)인데도 해 그림자를 보며 안일을 탐하니, 군자(君子)는 그가 잘 마무리하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더구나 존귀한 임금이겠습니까. 《예기(禮記)》에 ‘장엄하고 공경하면 날로 강해지고, 안일하고 방자하면 날로 경박해진다.[莊敬日強, 安肆日偸]’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은 궁궐 깊고 엄숙한 곳에 거처하며 부귀의 봉양을 극진히 받으니, 스스로 힘쓰지 않으면 안일함에 중독되지 않는 이가 드물 것입니다. 조종(祖宗)의 번성한 시대에는 임금이 종일 납시어 승지들이 번갈아 들어가 일을 아뢰고 공경(公卿)ㆍ근시(近侍)가 수시로 뵈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기(志氣)가 점점 강해지고 총명이 날로 나아질 뿐 아니라, 또한 인재를 익히 알고 이해(利害)에 더욱 밝아질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견문이 넓은 학자에게 힘입어 지혜를 더하고, 정직한 사람을 가까이하여 덕성(德性)을 도왔으니, 그 효과가 어찌 얕고 적었겠습니까.”
기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기강이 서는 것은 다른 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군주의 마음이 공평하고 정대하여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나의 바른 법을 해치게 하지 않고 충현(忠賢)을 널리 선발하고 진심으로 맡겨서 크고 작은 일에 직무를 다하게 하여 이 법을 유지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한 무제(漢武帝)는 형벌을 엄하게 하였으나 해내(海內)가 소란하였고, 수 문제(隋文帝)는 엄하게 다스리는 것을 숭상하였으나 천하가 더욱 어지러워졌습니다.
세상에서는 더러 법을 엄하게 하는 것을 가지고 기강을 논하기도 하지만, 고식적인 것을 가지고 인(仁)을 논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배도(裴度)가 당 헌종(唐憲宗)에게 말하기를 ‘한홍(韓弘)이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나가 적을 토벌하고 왕승종(王承宗)이 손을 거두어 땅을 바친 것은, 어찌 조정의 힘이 그들의 생사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습니까. 단지 조처가 마땅하여 그들의 마음을 감복시켰을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조치가 마땅하다면 어찌 기강이 서지 않을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제갈 무후(諸葛武侯)가 말하기를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은 모두 일체이니 선악을 상벌하는 것이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여기에 이어 말하기를 ‘작은 촉(蜀)나라로도 그 가운데에서 스스로 공사(公私)를 분별하였으니, 이 때문에 양주(梁州)ㆍ익주(益州)의 반을 차지한 나라로서 오(吳)나라와 위(魏)나라 전역을 도모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즈음에는 궁중과 부중의 구분이 판연히 둘로 갈라져, 사안이 궁액(宮掖)에 관계되고 옥사가 내간(內間 왕비나 후궁)에 관련된 것은 하나도 담당 관원에게 맡기지 못하니, 이것은 사사로운 뜻이 멋대로 행해질 조짐이고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큰 까닭입니다. 전하께서 성지(聖志)를 견고히 정하고 강단을 발휘하여 사사로운 은혜와 작은 어짊에 흔들리지 말고 구습과 잘못된 관례에 구애되지 않으시어, 먼저 내옥(內獄)을 파하시어 옥송(獄訟)을 한결같이 사구(司寇 옥송을 다루는 관원)에게 돌아가게 하고 궁척(宮戚)을 일제히 방헌(邦憲 나라의 법령)에 맡긴다면 기강이 엄숙해질 것입니다.”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기재예장(杞梓豫章) 같은 아름드리 재목들은 하루아침에 자라는 것이 아닌데 높은 산봉우리에는 소나무, 잣나무가 많은데 근교에는 아름다운 나무가 없으니, 일찍 기르지 않으면 어떻게 성취하겠습니까. 동량이 될 재목은 갑자기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닌데 큰 집이 무너지려 할 때에 버틸 만한 나무가 없고 썩은 그루와 약한 기둥이 번번이 나랏일을 망치니, 사직을 위하여 멀리 염려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미리 인재를 길러서 이 일을 담당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송 태종(宋太宗)은 장제현(張齊賢)을 얻을 때 같은 방(榜)에 속한 사람 모두를 급제시켰으며, 한기(韓琦)는 소식(蘇軾)이 병이 났다는 이유로 시험 날짜를 미루었습니다. 옛날 현명한 군주와 위대한 신하가 인재를 아끼는 것이 으레 이와 같았습니다.
또 선조(宣祖) 시대에 이항복(李恒福)ㆍ이덕형(李德馨)ㆍ신흠(申欽)ㆍ이정귀(李廷龜) 등은 모두 성상께서 간택하여 낭서(郞署)에서 발탁하였습니다. 김우옹(金宇顒)ㆍ유성룡(柳成龍)은 다 영남의 선비이고, 박순(朴淳)ㆍ정철(鄭澈)은 다 호중(湖中)에서 나왔습니다. 그 나머지는 이루 다 적을 수 없으나, 모두 초야의 소원한 선비로서 모두 한 시대의 으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호남과 영남의 선비가 조정에서 현달한 자리에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어찌 장구령(張九齡)이 소석(韶石) 출신이라 하여 도리어 중원에서 태어난 우선객(牛仙客)보다 못하겠습니까. 명문(名門)이나 우족(右族)이라고 하여 반드시 다 현명하다고 할 수 없으며, 초야의 소원하고 미천한 자라고 하여 어찌 다 재능이 없겠습니까. 현명한 자를 등용할 때는 부류를 따지지 않는데, 어찌 원근을 가리겠습니까. 예전과 지금을 견주어 볼 때 매우 한숨이 나옵니다.”
병정(兵政)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주 세종(周世宗)이 일찍이 ‘농부 백 사람이 전사(戰士) 한 사람을 기르지 못한다. 내가 이 쓸데없는 것을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고 드디어 쓸데없는 인원을 도태하고 정병(正兵)을 가리니 군대의 위세가 드디어 떨쳐졌습니다. 그러니 군대가 강하고 약한 것은 군사의 많고 적은 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각 도 속오군(束伍軍)을 대규모로 모아 훈국(訓局 훈련도감(訓鍊都監))과 어영청(御營廳)의 군사를 합치면 통틀어 10만의 숫자가 되니, 그 나머지 쓸데없는 군졸을 모두 없애어 어린아이까지 함께 군적(軍籍)에 포함되는 걱정이 없게 하십시오. 무재(武才)가 뛰어나거나 활을 명중시킬 수 있는 자가 아니면 다 화수(火手)로 삼고, 또 출신(出身)ㆍ무학(武學)에서도 정예하고 용맹한 자를 가려 한 대(隊)를 만들어야 합니다.
훈련도감의 병사 또한 노약자를 제거하고 정예병을 뽑아 거기에 들어갈 곡식을 어영청(御營廳)에 주둔하고 있는 군졸에게 옮기고 보인(保人)에게서 쌀을 거두는 것은 면제해 줌으로써 병장(兵仗 병기나 군장)의 자급에만 전념하게 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병사는 정예화하고 식량은 충분할 것입니다.
또한 양민이 점차 줄어드는 것은 사천(私賤)이 날로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임금의 보배는 백성인데, 나라의 반이 사천이고 집에서 기르는 수가 천 명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종모법(從母法)을 시행하여 백성을 잃는 단서를 막아야 합니다.
기조(騎曹 병조)의 정병(正兵)은 모두 적을 막는 데 쓸 수 있는 자들입니다. 조종조의 제도에 각 관청에 복역시켰을 뿐 아니었으니, 또한 시의에 맞게 강구하여 옛 제도를 회복하십시오.”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번에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것은 더욱 음(陰)이 자라날 조짐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별빛이 낮에 빛나고 간사한 무지개가 해를 가렸으니, 음이 성하고 양이 쇠퇴하는 형상 또한 매우 밝게 드러났습니다. 예전에 소옹(邵雍)이 말하기를 ‘나라가 흥할 때에는 반드시 임금의 도(道)가 성하고 아버지의 도가 성하고 남편의 도가 성하고 군자의 도가 성하나, 망할 때에는 반드시 신하의 도가 성하고 자식의 도가 성하고 아내의 도가 성하고 소인의 도가 성한다. 이 때문에 〈구괘(姤卦)〉의 초육(初六)에서 여장(女壯)을 미리 경계하였으니, 성인(聖人)이 양을 돕고 음을 누른 그 뜻이 깊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선을 들어 쓰고 악을 막으며, 옳은 것을 옳게 여기고 그른 것을 그르게 여겨 군자의 도가 자라나고 소인의 도가 소멸되게 하며, 부시(婦寺 부녀자와 내시)를 물리치고 충직한 자가 무리 지어 나오게 하며, 덕의(德義)를 먼저 힘쓰고 공리(功利)를 뒤로하며, 명분(名分)을 삼가고 백성의 마음을 안정시켜 양강(陽剛)의 정치를 밝히십시오.”
상이 공의 말을 가납하고 공과 대신들을 불러들여 주상 앞에서 회의한 뒤 대부분 시행하였다.
~ 서하 이민서 선조, 선고영의정부군가장〔先考領議政府君家狀〕,서하집제15권/행장(行狀)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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