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라
하나님은 그 분의 주권으로 세상 만물은 물론 인간의 모든 삶도 통치하시는데,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조차도 그 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활용하신다.
지혜의 대명사 솔로몬은 잠언 19장 21절에서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라고 하였는데, 이는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어도, 성취되는 것은 오직 주 하나님의 뜻뿐이다’ 라는 의미이다.
인간의 지혜로는 다 이해할 수가 없는 하나님의 계획은 도덕적인 행위자가 되어야 마땅한 인간의 구체적인 선택 하나하나를 통하여서도 이루어져 간다.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한 비도덕적인 나쁜 행동조차도 하나님의 섭리(攝理),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원리와 법칙 안에서 하나님의 인류를 구원(救援)하려는 계획을 이루어가는 하나의 요소로 사용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은 하나님이 스스로 계획하시고 그대로 실행하신 사건이지만, 한편으로 인간의 사악하고 탐욕스런 결정을 활용하여 그의 인류 구원(救援)의 계획을 위해 진행하신 사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믿고 살아가야 할 것이로되, 비록 어떤 이해할 수 없고 통탄스러운 일들이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더라고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활용되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合力)하여 선(善)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장 28절).
우리 동양에서도 일찍이 ,예수그리스도의 전파(傳播)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깨우친 분들이 있었으니 맹자와 백강 이경여 선생 등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하늘의 이치(理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맹자가 말하기를 “군자가 학문을 깊게 함에 있어 올바른 방도로 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理致)를 스스로 터득하고자 해서이다. 하늘의 이치를 스스로 터득하게 되면 처신하는 데에 편안하고, 처신하는 데에 편안하면 삶의 깊이가 깊어지니 그걸 크게 활용할 수 있고, 크게 활용할 수 있게 되면 일상의 좌우(左右)에서 취해도 그 이치의 근원과 만나게 된다. 그래서 군자는 하늘의 이치를 스스로 터득하려고 하는 것이다.”하였다. [孟子曰(맹자왈)君子深造之以道(군자심조지이도)欲其自得之也(욕기자득지야) 自得之則居之安(자득지즉거지안)居之安則資之深(거지안즉자지심)資之深則取之左右(자지심즉취지좌우)逢其原(봉기원) 故(고)君子(군자)欲其自得之也(욕기자득지야).]』<맹자(孟子) 이루하(離婁下) 14장>.
이후 백강 이경여 선생은 반드시 이 하늘의 이치를 따라서 나라를 다스리며 살아갈 것을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한 바가 있다.
1631년(인조 9년) 10월 3일 이경여 등이 상차(上箚)하기를, “임금은 높은 지위에 있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 두려워 할 것은 하늘뿐입니다. 하늘은 이치(理致)이니, 한 생각이 싹틀 때 하늘의 이치에 합하지 않으면 이는 하늘을 어기는 것이고, 하나의 일을 행할 때 하늘의 이치를 따르지 않으면 이는 하늘을 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정성으로 하늘을 섬기면 천명(天命)이 계속 아름답게 내려지지만 하늘을 어기고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면 그 천명이 영원히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마음은 인자(仁慈)하여 갑자기 끊어버리지 못하니, 반드시 먼저 견책(譴責)하고 그래도 깨닫지 못하여 끝내 고치지 않은 다음에야 크게 벌(罰)을 내리는 것입니다. 하늘이 멸망시키거나 사랑하여 돕는 것은 공경과 불경(不敬), 정성과 불성(不誠)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천명(天命)은 일정함이 없으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하늘의 이치를 어기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탐욕에 빠져 살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나라 망하고 백성들은 바빌론제국에 포로로 끌려가서 70년을 노예생활로 온갖 고생을 하면서 크게 회개하였고, 이후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구원을 받고 조국의 옛 땅으로 돌아옴으로 노예생활을 면한 바가 있다. 이런 역사에서 우리는 배우지 못하면 오늘날 우리들의 운명도 그와 같을 수가 있다.
“우리는 바빌론 강변에 앉아서 시온(Zion)을 기억하며 울었다. 우리가 수금(竪琴)을 버드나무 가지에 걸었으니 우리를 사로잡은 자들이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고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이 즐거운 노래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불러라.' 하고 말하였음이라. 우리가 외국 땅에서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수금 타는 법도 잊어버리기를 원하노라.(시편 137편 1-5절)” 이는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 강변에 앉아 조국 시온과 수도 예루살렘을 그리며 울부짖은 비탄의 노래이다.
2025. 6.11. 素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