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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유불급(過猶不及)

Abigail Abigail 2021. 4. 10. 09:57

과유불급(過猶不及)

 

논어 선진편(先進篇)에 나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은 ‘정도에 지나치면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의미인데 내 생각으로는 정도에 지나치면 오히려 미치지 못함만 못한 것 같다. 너무 배불리 먹는 것보다 오히려 조금 덜 먹는 것이 몸을 가볍게 하여 병을 유발할 가능성도 적어지니 장수(長壽)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 고린도전서 6장12절에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라는 귀한 말씀이 있어 우리의 생각을 가다듬게 하고 있다.

 

거의 모든 사람은 살인 절도 강간 사기 등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그러나 사탄(Satan)의 방책은 선(善)한 것으로 사람을 꾀어 들여서 이것이 정도(程度)를 넘도록 하여 그를 죄(罪)에 빠지도록 유도하는 것임을 알고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Neil Anderson 목사).

 

휴식이 게으름이 되지 않게 하라, 이익을 추구함이나 남의 것에 대한 관심이 탐욕이 되지 않게 하라, 인생을 즐김이 방종이 되지 않게 하라, 육신의 쾌락을 추구함이 호색(好色)함이 되지 않게 하라, 스스로 조심하는 것이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라, 스스로를 존중함이 자만심이 되지 않게 하라, 의사소통이 남에 대한 험담(險談)이 되지 않도록 하라, 이단(異端)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함이 불신앙이 되지 않게 하라, 화(火)를 잘 내는 것이 격노(激怒)로 변하고 성격이 포악(暴惡)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사랑하는 것이 과잉보호(過剩保護)가 되지 않도록 하라, 남을 판단하는 것이 비난(非難)이 되지 않도록 하라, 우정이 동성애로 타락하지 않도록 하라, 성(性)적인 자유를 누림이 부도덕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자각(自覺)이 완벽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관대함이 낭비벽을 유발하지 않도록 하라, 자기를 보호하려다 부정직함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주의함이 지나쳐 두려움이 되지 않도록 하라.

 

이것들은 말은 쉬우나 판단하고 실천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으로 반드시 중용(中庸)의 덕(德)을 배워가야만 할 것인데, 이 중용(中庸)의 덕이란 도덕이론에 있어 과(過) 또는 부족(不足)이 없는 행위의 준칙(準則)이라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성현(聖賢)들의 말씀은 다음과 같으니, 공자는 물론 그의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와, 그리스의 플라톤(Platon)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 의해 주장되었다.

 

자사는 그의 저서 《중용》을 통하여 인간행위의 이상적 기준으로 중용의 원리를 체계화하여 중국과 한국에 널리 영향을 미쳤다. 그에 의하면 중(中)이란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이 꼭 알맞은 것을 말하며, 용(庸)은 언제나 변함이 없이 바른 것을 말한다. 즉, 중용이란 덮어놓고 중간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행위의 가장 참되고 불변하는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행위의 준칙으로 절제·용기·지혜·정의의 4덕(德)을 말하고 있는데, 이 덕은 균형과 조화라는 중용의 사상 위에 세워진 것이다.

 

나아가 중용은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중심 개념이다. 그는, 인간에게는 누구나 충동과 욕망이 있는데 이것이 그대로 인간생활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되며, 부족과 과도(過度)의 중용으로 조정되어야 한다고 했다. 도덕적인 덕은 이 중용이 어느 정도로 실현되는가에 따라 생겨나며, 이때의 중용은, 행동이 양 극단 사이의 중간을 취하는 것이되 수량적인 중간치가 아니라 최선성(最善性)의 위치에 서는 것을 말한다 (서울대학교 교육연구소).

 

이에 대해 성경에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온다.

 

신명기 5장32절에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 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분한 공부와 올바른 체득(體得)이 필수적인 것으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습관과 이를 실천하며 살아가려는 불굴의 의지를 가져야만 한다.

 

중용을 실천함이 칼날 위에 서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공자의 말과 같이 중용의 길은 참으로 평생에 걸쳐 배워 가야할 길이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배우는 일이 이 세상에서는 이루어 질수가 없고 천국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완성이 될 수 있다 는 것처럼...

 

그러나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는 일에 일로매진(一路邁進)한다면 중용의 덕은 저절로 깨우치게 되는 것이리라! 진리는 언제나 단순 명료하다.

 

2021. 4.10. 이 주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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