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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모순, 어떻게 극복할까?

Abigail Abigail 2026. 7. 14. 18:17

이 시대의 모순, 어떻게 극복할까?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지혜는 모자란다. 말은 너무 많이 하고 거짓말은 너무 자주 한다. 돈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가치 있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 시간은 늘어났지만 삶의 의미를 찾는 법은 상실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 졌다. 외계를 정복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안의 세계는 잃어 버렸다. 공기정화기는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고 키는 커졌지만 인품은 왜소해졌다. 여가시간은 늘어났어도 마음의 평화는 줄어들었다. 쾌락을 선사하는 것들은 많아졌으나 행복은 더 느끼기 더 어려워 졌다. 호사스러운 결혼식은 많지만 더 비싼 대가를 치르는 이혼은 늘었다. 집은 훌륭해졌지만 더 많은 가정이 깨어지고 있다.”<제프 딕슨(Geoff Dixon), ‘우리 시대의 역설(逆說)’ 중에서>.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왜 이렇게 영적·정신적으로 황폐화 된 것일까?

 

생각건대, 우리는 실용적인 학문이나 기술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는 너무도 열심인 반면, 인간답게 사는 길에 대한 가르침과 공부는 너무도 왜소해진 데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고 본다.

 

본디 인간의 행복은 인격의 성숙에 따라서 저절로 찾아드는 부산물과 같은 것으로 우리가 행복을 찾겠다고 행복을 목표로 나서는 한 더욱 더 참다운 행복을 맞보기는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교육도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정신을 따라 크게 전환하여 참다운 인간을 만드는 길 즉 성심(聖心)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성학(聖學)에 열중하는 데에 가장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성심(聖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개 본심이 지켜지지 않으면 덥지 않아도 답답하고 춥지 않아도 떨리며 미워할 것이 없어도 노엽고 좋아할 것이 없어도 기쁜 법이니, 이 때문에 군자에게는 그 마음을 바루는 것보다 중대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잡히고 나면 덥더라도 답답하지 않고 춥더라도 떨리지 않으며 기뻐할 만해야 기뻐하고 노여울 만해야 노여우니, 주자(朱子)가 이른바 대근본(大根本)이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함양하는 방도는 반드시 발동되기 전에 지키고 발동된 뒤에 살피며 미리 기필하지 말고 잊지도 말아 보존해 마지않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비고 밝은 한 조각 마음이 그 속에 거두어져 있어 북돋는 것이 깊고 두터우며 이(理)가 밝고 의(義)가 정(精)하여 경계하고 삼가고 두렵게 여기는 것이 잠시도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근본이 이미 굳어져서 어느 것을 취하여도 본원(本源)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키고 버리는 사이에서 주재(主宰)하는 것이 없으면 마음이 이미 없는 것이니, 어찌 외물(外物)에 대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공부가 어찌 일조일석에 되는 것이겠습니까.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천덕(天德)·왕도(王道)는 그 요체가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데에 있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홀로 있을 때를 삼가지 않아서 유암(幽暗)하고 은미(隱微)한 데에 문득 간단(間斷)되는 곳이 있다면 어떻게 날로 고명(高明)한 데에 오르겠습니까. 성인(聖人)의 극치(極治)라는 것도 결국은 이 길 외에 따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학(聖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덕을 밝히려는 옛사람이 마음을 바루는 것을 근본으로 삼기는 하였으나, 본심의 착함은 그 체가 지극히 작은 반면 이욕(利欲)이 공격하는 것은 번잡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성색(聲色), 취미(臭味)와 완호(玩好), 복용(服用)과 토목(土木)을 화려하게 하고 화리(貨利)를 불리는 일이 잡다하게 앞에 나와 거기에 빠지는 것이 날로 심해집니다. 그 사이에 착한 꼬투리가 드러나 마음과 몸이 고요한 때는 대개 열흘 추운 중에 하루 볕 쬐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 학문을 강명(講明)하여 이 마음을 개발(開發)하지 않으면, 또한 어떻게 이 마음의 바른 것을 회복하고 이욕의 사사로운 것을 이겨 만화(萬化)의 주재가 되고 끝이 없는 사변(事變)에 대응하겠습니까. 이른바 강학(講學)은 장구(章句)나 구독(口讀)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깊이 몸 받고 그 지취(旨趣)를 밝혀서, 자신에게 돌이켜 의리의 당연한 것을 찾고 일에 비추어 잘잘못의 기틀을 증험함으로써,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참으로 아는 동시에 미리 생각하여 익히 강구하고 평소부터 대책을 세워두어야 합니다.』<1653년 효종4년 7월 2일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올린 상차문(上箚文)에서>

 

2026. 7.15. 素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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