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분낙도

탐심을 물리치는 훈련

Abigail Abigail 2025. 5. 30. 22:56

탐심을 물리치는 훈련

 

진리를 찾아가는 길은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섭리자이시고 진리요 생명이신 하나님과 그의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화와 기쁨을 누리기를 갈구하는 도(道)는 바로 자아(自我)를 버리는 훈련인데, 자아를 버리는 훈련은 다름 아닌 탐심(貪心)을 물리치는 훈련이다.

 

“삼가 모든 탐심(貪心)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누가복음 12장 15절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인데, 이에 부연하여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땅에 있는 육체의 욕망을 죽이라, 그 중에 탐심(貪心)은 우상 숭배니라”라고 하며 크게 경계 하였다. 생각건대 재물은 인격을 닦는 데 가장 큰 적이다. 우리가 재물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가장 큰 장애물을 극복한 것이다.

 

“사람이 오직 한 가닥 사사로운 것을 탐내면 문득 강직한 기질도 마모돼 유약해지고 지혜가 막혀 어두워질 뿐만 아니라 인자한 마음마저 혹독해지고 또 결백한 뜻도 더러워져 평생의 인품을 깨뜨리게 되나니, 옛 성현들이 탐심을 멀리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 까닭은 그것으로 일생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인지일념탐사(人只一念貪私) 변소강위유(便銷剛爲柔) 색지위혼(塞智爲昏) 변은위참(變恩爲慘) 염결위오(染潔爲汚) 괴료일생인품(壞了一生人品), 고(故) 고인(古人) 이불탐위보(以不貪爲寶) 소이도월일세(所以度越一世).]” <채근담(菜根譚)>.

 

허나 항상 탐심을 버리고 살 것을 다짐하지만 쉽게 버려지지 않는 것이 탐심이다. 다만 탐심이 버려진 곳에 담겨지는 행복은 본인만이 알 수 있는 기쁨이요, 성취이다. 이런 취지에서 노자는 도덕경 7장에서 “성인은 자신을 뒤에 머물게 함으로 앞서고, 떠나 잊으므로 자신이 존재하게 된다. 그것은 사사로운 탐심이 없기 때문이며, 그러함으로 자신을 이룰 수 있다.[시이성인(是以聖人) 후기신이신선(後其身而身先) 외기신이신존(外其身而身存). 비이기무사사(非以其無私邪) 고능성기사(故能成其私)]”라고 말한 바 있다.

 

신앙생활은 훈련이다. 그것은 ‘버리는 훈련’이다. 사람들은 소유에 집착하여 버리지를 못한다. 어느 시인이 쓰기를 “열 살에 캔디에, 스무 살에 연인에, 서른 살에 쾌락에, 마흔 살에 야심에, 쉰 살에 탐욕에 넘어가지 않을 자 누가 있으리요”하였다. 그러나 인생은 근본적으로 소유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본질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에 이를 수 없다. 인생은 근본에 있어 ‘소유하는 것(To have)’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To be)’이다. 그 존재도 일시적인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임하는 참된 축복을 누릴 수 있는 한 가지 기술이 있다. 이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건 그것은 하늘의 선물임을 인식하는 기술이다. 그리고 내가 받은 것을 언제나 내놓을 수 있는 기술이다. 이 기술을 체득(體得)한 사람은 하늘이 주는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자아를 버리고 탐심을 물리치는 훈련은 말은 쉬우나 그 실천은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옛적 우리 조상님들은 그렇게도 우리들의 “마음의 수양(修養)”을 강조하셨나보다. 백강 이경여 선생은 1653년(효종 4년)「재변 극복을 위한 상차문(上箚文)」에서 “마음의 수양”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군자(君子)에게는 그 마음을 수양하는 것보다 중대한 것이 없으니, 주자(朱子)가 말한 대근본(大根本)이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함양하는 방도는 반드시 발동되기 전에 지키고 발동된 뒤에 살피며 미리 기필하지 말고 잊지도 말아 보존해 마지않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비고 밝은 한 조각 마음이 그 속에 거두어져 있어 북돋는 것이 깊고 두터우며 이(理)가 밝고 의(義)가 정(精)하여 경계하고 삼가고 두렵게 여기는 것이 잠시도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근본이 이미 굳어져서 어느 것을 취하여도 본원(本源)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수양하는 공부가 어찌 일조일석에 되는 것이겠습니까.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천덕(天德)·왕도(王道)는 그 요체가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데에 있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홀로 있을 때를 삼가지 않아서 유암(幽暗)하고 은미(隱微)한 데에 문득 간단(間斷)되는 곳이 있다면 어떻게 날로 고명(高明)한 데에 오르겠습니까. 성인(聖人)의 극치(極治)라는 것도 결국은 이 길 외에 따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건대, 탐심을 물리치는 훈련은 결국 마음을 수양하는 훈련에 달려있다. 마음을 수양하는 훈련의 핵심은 홀로 있을 때에도 삼가는 태도 즉 홀로 있을 때조차도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며 지내는 습관이다.

능호관 이인상 선생, '노송도'

2025. 5.31. 素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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