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분낙도

남이 나를 모욕할지라도

Abigail Abigail 2025. 3. 29. 00:29

남이 나를 모욕할지라도

 

우리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어 가고자 한다면,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주는 다양한 상처들에 연연해서는 큰 뜻을 이룰 수가 없다. 이는 사람은 누구나 태어 날 때부터 죄성(罪性)을 지닌 결함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자신의 궁극적 삶의 목적의 실현만을 바라보고 스스로 마음을 수양(修養)하며 인격을 연마(鍊磨)해 나가야하는 것이다.

 

“남의 속임을 깨닫고도 말로 나타내지 아니하고, 남에게 모욕을 받으면서도 낯빛에 나타내지 아니하는, 그 가운데에 무궁무진한 뜻이 있고, 또한 무궁무진한 작용이 있는 것이니라.[각인지사(覺人之詐), 불형어언(不形於言). 수인지모(受人之侮), 부동어색(不動於色). 차중유무궁의미(此中有無窮意味), 역유무궁수용(亦有無窮受用).]”<채근담(菜根譚)>.

 

남이 나를 속이는 것을 알면서도 입 밖에 내지 않고, 남이 나를 업신여겨도 얼굴빛을 변하지 않는다면, 이는 큰 수양(修養)을 이룬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어떠한 일도 해나갈 수 있는 사람으로 무궁한 발전이 있을 것이며, 또한 큰 활동과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이 나를 속이는 것이나, 나를 업신여기는 것들에 대해 그에게 되돌려 값아 복수 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인격을 연마하여 이를 더 높은 삶의 목적을 이루는 소재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남이 나를 속이는 것을 알고도 즉시 이를 말하지 아니하고, 그의 인격을 존중하고 사랑하여 후일 적절한 시점에 은밀히 그 잘못을 깨닫게 한다면, 그는 감동하여 사람이 변화되고 나아가 나에 대한 높은 신뢰와 존경을 가지게 될 것이며, 이렇게 좋아진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내가 도모하는 선한 목적을 이루는 데에 협조를 얻어 갈 수가 있을 것이다.

 

남이 나를 업신여기는 데에도 면전에서 얼굴색이 변하거나 노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보다 훨씬 높은 영적·정신적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남을 업신여기는 것은 업신여기는 당사자의 잘못이나 부족함에 기인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으로 가장 존엄한 존재로 그 누구도 남의 업신여김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한사람의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데에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이며,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 주었고, 공자는 아무리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자라도 반드시 깊이 살펴보라고 하였다.

 

자기를 속이거나 업신여기는 자 앞에서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사랑하며 그의 잘못을 이해하는 것이며, 이로써 그와 주변을 감화시킴으로 자신의 선한 목적을 이루는 좋은 기반으로 활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원수를 갚는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로마서 12장 19절).

 

이런 취지에서 율곡 이이 선생은 그의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입지(立志)에 대해 말하기를 “처음 배우는 이는 먼저 뜻을 세우되 반드시 성인(聖人)이 될 것을 스스로 기약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을 별 볼 일 없게 여겨 물러나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일반 사람도 그 본성은 성인(聖人)과 똑같으며 사람의 본성은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구별이 없다. 그런데 어찌하여 성인은 유독 성인이 되고, 나는 유독 평범한 사람이 되는가. 이는 진실로 뜻이 서지 못하고 앎이 분명치 못하고, 행함이 독실(篤實)하지 못해서이다. 뜻을 세우는 것과 밝게 아는 것과 독실하게 행하는 것 모두가 나 자신에게 달려 있으니 어찌 다른 데서 구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우리는 용기 있게 나갈 수가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삶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닮고 이 세상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과업을 잘 수행하고 내세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결국 기독교인이 삶의 뜻을 세우는 것도 율곡 이이 선생이 말한 입지(立志)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왜 종종 사랑하는 주변 가까운 사람들에게 비난과 원망을 쏟아내는가? 오직 하늘의 섭리(攝理)만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들, 애초에 그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은 것들을 그들에게 기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이나 어떤 사람이 우리 마음의 텅 빈 공간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삶에서 하늘의 섭리가 차지해야 할 자리를 누가 대신 차지하고 있는 관계는 결국 그 관계 자체를 파괴하고 만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린도후서 3장 5절). 이것이 우리가 뜻을 세우고 하늘의 섭리, 하나님의 말씀들을 배우고 실천해 나가야하는 이유이다.

 

2025. 3.29. 素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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