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하장감음(河莊感吟) 교하의 별장에서 느낌이 있어 짓다

Abigail Abigail 2021. 3. 22. 11:51

하장감음(河莊感吟) 교하의 별장에서 느낌이 있어 짓다

··· 한포재 이건명 선조 (한포재집 권1에서)

 

만력(萬曆) 병진년(1616, 광해군8)에 증조부 형제께서 교하(交河)의 장포(長浦)에 처음 거처를 정하자, 이때부터 대대로 우리 집안의 세장(世莊)으로 삼아 오가며 휴식하는 곳으로 삼았다. 계축년(1673, 현종14)에 우리 부친이 벼슬을 그만두고 내려왔고, 중부(仲父) 죽서공(竹西公) 또한 이곳으로 와서 두 집이 작은 언덕을 사이에 두고 한 마을에 살며, 아침저녁으로 종유하여 즐겁게 담소를 나누니 한 이불 덮고 자는 즐거움이 완연하였다. 나는 당시에 나이가 아직 어렸지만 그래도 우리 아버지를 곁에서 모실 수 있었다. 아버지의 율시 한 수를 기술하여 그 일을 기록하노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조부께서 전원에 돌아와 얻은 집 한 채, 여기 오니 오십팔 년 흘렀구나. 아가위 꽃은 아직도 색동옷 입고 앉은 모습 기억하고, 교목은 여전히 지팡이 짚고 노닐던 곳에 남아있네. 성대한 일 지금 다시 잇노니 유풍 유구한데 감히 초지를 잊으리오. 선화리(善和里)의 서적과 평천장(平泉莊)의 수석, 자손에게 구대를 살 집 남기네.”

 

계축년(1673)부터 지금까지 이십 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양가 어른이 모두 돌아가셨으니, 인간사의 변천은 더욱 차마 말하지 못할 바가 있구나. 옛 집이 무너져 살 수 없었는데, 지난해에 겨우 보수하고 서울에서 온 가족을 데리고 와서 살았다. 아버지를 여읜 뒤에 서글픈 마음 이길 수 없어 공경히 전운(前韻)을 차운하여 형님께 가르침을 구하고 똑같이 이러한 마음을 품은 제종들에게 돌려 보이노라.

 

팔십 년 동안 네 번 거처 바뀌고八十年中四易廬

부친 돌아가신 지금 이내 생만 남았구나終天今日此生餘

인간사 흐르는 물 같아 견딜 수 없거늘未堪人事如流水

게다가 동산도 폐허가 돼버렸구나況乃園林變舊墟

집 짓고서야 뜻 이을 수 있었으니堂構後來猶繼志

형님과 함께 이제부터 초지 힘쓰려네壎篪從此勉如初

언덕 너머 생각하면 가장 마음 아프니 隔岡最是傷心地

다시는 화산을 나누어 살 수 없구나無復華山一半居

 

* 교하(交河) : 파주(坡州) 경계에서 서쪽으로 16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현(縣)으로, 현재의 파주시 교하면이다.

1) 장포(長浦) : 파주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주 북쪽 가을두동(加乙頭洞)에서 나와서 임진도(臨津渡)에 흘러든다.《新增東國輿地勝覽 卷11 京畿 坡州牧》

2) 중부(仲父) 죽서공(竹西公) : 이민적(李敏廸, 1625∼1673)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혜중(惠仲), 호는 죽서이니, 이민서(李敏叙)의 둘째형이다. 1656년(효종 7) 별시(別試)에 장원급제한 뒤 정언․교리(校理)․대사성(大司成) 등을 거쳐 이조․호조의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3) 한 이불……즐거움 :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함을 말한다. 《신당서(新唐書)》 권81 〈삼종제자열전(三宗諸子列傳)〉에 “당 현종(唐玄宗)이 태자가 되었을 적에 일찍이 큰 이불과 긴 베개[大衾長枕]를 만들어 여러 아우들과 함께 베고 덮었다.” 하였다.

4) 아버지의……수 : 이시는 한국문집총간 144집에 수록된 《서하집》 권4 〈정중씨죽서공(呈仲氏竹西公)〉이다.

5) 아가위……기억하고 : 색동옷 입고 앉은 모습은 춘추(春秋) 시대 초(楚)나라의 은사(隱士)인 노래자(老萊子)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니, 부모를 잘 봉양하는 효자를 말한다.

6) 선화(善和)의 서적 : 옛집에 보관하는 장서를 말한다. 《신당서(新唐書)》 권168 〈유종원열전(柳宗元列傳)〉에 “하사받은 서적 3천 권이 아직 선화리(善和里)의 옛집에 있다.” 하였다.

7) 평천장(平泉莊)의 수석 : 평천장은 당나라 이덕유(李德裕)의 별장 이름으로, 기화요초(琪花瑤草)와 아름다운 수석으로 유명하였다.《舊唐書 卷174 李德裕列傳》

8) 구대 : 자손들이 친족 간에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을 말한다. 《구당서(舊唐書)》권188 〈효우열전(孝友列傳)〉에 “운주(鄆州)의 장공예(張公藝)가 9대가 함께 살아[九代同居], 북제(北齊)․수(隋)․당(唐)에 걸쳐 정문이 내려졌다. 당 고종(唐高宗)이 태산(泰山)에 일이 있어 가는 중에 운주에 들러 그의 집을 방문하여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를 묻자, 장공예가 다만 지필묵을 꺼내어 참을 인(忍) 자 100여 자를 써서 올렸다.” 하였다.

9) 계축년부터……돌아가셨으니 : 1673년(현종14)에 중부 이민적이 별세하고, 1688년(숙종14)에 아버지 이민서가 별세하였다. 이듬해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이건명이 큰형 이관명(李觀命)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 교하로 내려와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렀다.《兼山集 卷14 左議政寒圃李公行狀, 韓國文集叢刊 續74輯》

10) 형님과 함께 : 원문의 ‘훈지(壎篪)’는 질나팔[壎]과 젓대[篪]이니, 형제 사이에 화목하게 지냄을 비유한 말로, 큰형 이관명과 우애 있게 지냄을 말한 것이다. 《시경》 〈하인사(何人斯)〉에 “백씨(伯氏)가 질나팔을 불면 중씨(仲氏)가 젓대를 분다.[伯氏吹壎, 仲氏吹篪.]” 하였다.

11) 죽서공이 돌아감으로 죽서공이 예전에 살던 터를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말구에 이와 같이 말하였다. 죽서공의 후손들은 이후 부여 백강리로 내려가서 살았다. 백강리는 백마강변의 조부 백강 이경여 선생이 말년에 지내시던 곳이다.

화산을……없구나 : 화산을 나누어 살자는 것은 두 사람이 한 곳에서 같이 은거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송나라 장영(張詠)이 포의(布衣)로 있을 때 화산(華山)에 은거하고 있던 희이(希夷) 선생 진단(陳摶)을 뵙고는 화산에 은거하고 싶어 하자, 진단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공이라면 내 마땅히 반을 나누어 주겠소.” 하였다. 《夢溪筆談 卷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