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대근본(大根本),
~ 학문을 강명(講明)하여 마음을 개발(開發)하지 않으면
인간의 마음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체인 것이므로 내 마음을 가다듬고 기르기를 계속해 가기 위해 성현님들의 말씀을 다시 여기에서 새롭게 상고(詳考)해 보고자 한다.
1. 불가(佛家)의 말씀
심위법본 심존심사(心爲法本 心尊心使)
마음이 모든 법의 근본이 되어 마음이 주인이 되고 마음이 지배한다.
중심염악 즉언즉행(中心念惡 卽言卽行)
나쁜 생각을 마음에 품고 살면 재앙과 고통이 지은대로 따라온다.
거력우철(車轢于轍)
수레가 삐걱거리며 바퀴자국을 쫓아가듯이
~ 법구경 1. 雙要品 1장
2. 성경(聖經)의 말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 잠언 4:23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마태복음 5:8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마태복음 11:29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 시편 7:10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 잠언 15:13
3. 유학(儒學)의 말씀
所謂修身(소위수신)在正其心者(재정기심자)
心有所忿懥(심유소분치)則不得其正(즉불득기정)有所恐懼(유소공구)則不得其正(즉불득기정)
有所好樂유소호요則不得其正즉불득기정有所憂患유소우환則不得其正즉불득기정
心不在焉(심불재언)視而不見(시이불견)聽而不聞(청이불문)食而不知其味(식이불지기미)
此謂脩身(차위수신)在正其心(재정기심)
이른바 ‘몸을 닦는 방법은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에 있다.’는 것은,
마음에 노여움이 있으면 마음이 바를 수 없고, 두려움이 있으면 마음이 바를 수 없고,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마음이 바를 수 없고, 걱정이 있으면 마음이 바를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음이 다른 데로 쏠려 제자리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런 상태로는 언행이 제대로 될 리 없으니, 그래서 ‘몸을 닦는 방법은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 대학(大學) / 전문(傳文) 7장 소위수신재정기심자(所謂修身在正其心者)
4. 선조님의 말씀
효종 4년 계사(1653) 7월 2일(을축)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상차하기를,
성심(聖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개 본심이 지켜지지 않으면 덥지 않아도 답답하고 춥지 않아도 떨리며 미워할 것이 없어도 노엽고 좋아할 것이 없어도 기쁜 법이니, 이 때문에 군자에게는 그 마음을 바루는 것보다 중대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잡히고 나면 덥더라도 답답하지 않고 춥더라도 떨리지 않으며 기뻐할 만해야 기뻐하고 노여울 만해야 노여우니, 주자(朱子)가 이른바 대근본(大根本)이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함양하는 방도도 불씨(佛氏)처럼 면벽(面壁)하거나 도가(道家)처럼 청정(淸淨)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발동되기 전에 지키고 발동된 뒤에 살피며 미리 기필하지 말고 잊지도 말아 보존해 마지않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비고 밝은 한 조각 마음이 그 속에 거두어져 있어 북돋는 것이 깊고 두터우며 이(理)가 밝고 의(義)가 정(精)하여 경계하고 삼가고 두렵게 여기는 것이 잠시도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근본이 이미 굳어져서 어느 것을 취하여도 본원(本源)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키고 버리는 사이에서 주재(主宰)하는 것이 없으면 마음이 이미 없는 것이니, 어찌 외물(外物)에 대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仁)을 숙련하는 공부가 어찌 일조일석에 되는 것이겠습니까.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천덕(天德)ㆍ왕도(王道)는 그 요체가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데에 있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홀로 있을 때를 삼가지 않아서 유암(幽暗)하고 은미(隱微)한 데에 문득 간단(間斷)되는 곳이 있다면 어떻게 날로 고명(高明)한 데에 오르겠습니까. 당 태종(唐太宗)이 일찍이 ‘임금의 한 마음은 공격받는 것이 많다. 조금이라도 게을리하여 그 하나만 받아들이는 날이면 위망(危亡)이 따른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그 자성(資性)이 밝고 트여 이 마음이 희미한 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인(聖人)의 극치(極治)라는 것도 결국은 이 길 외에 따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중주(中主)의 소강(小康)도 이를 빌려서 다스렸을 것이니, 다니기가 험한 산길에서 애쓰고 초목이 무성한 곳에서 배회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성학(聖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덕을 밝히려는 옛사람이 마음을 바루는 것을 근본으로 삼기는 하였으나, 본심의 착함은 그 체가 지극히 작은 반면 이욕(利欲)이 공격하는 것은 번잡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성색(聲色) 취미(臭味)와 완호(玩好) 복용(服用)과 토목(土木)을 화려하게 하고 화리(貨利)를 불리는 일이 잡다하게 앞에 나와 거기에 빠지는 것이 날로 심해집니다. 그 사이에 착한 꼬투리가 드러나 마음과 몸이 고요한 때는 대개 열흘 추운 중에 하루 볕 쬐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 학문을 강명(講明)하여 이 마음을 개발(開發)하지 않으면, 또한 어떻게 이 마음의 바른 것을 회복하고 이욕의 사사로운 것을 이겨 만화(萬化)의 주재가 되고 끝이 없는 사변(事變)에 대응하겠습니까.
이른바 강학(講學)은 장구(章句)나 구독(口讀)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인의 가르침을 깊이 몸받고 그 지취(旨趣)를 밝혀서, 자신에게 돌이켜 의리의 당연한 것을 찾고 일에 비추어 잘잘못의 기틀을 증험함으로써,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참으로 아는 동시에 미리 생각하여 익히 강구하고 평소부터 대책을 세워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경중을 재제(裁制)하는 일을 거론하여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신기한 것만 일삼고 고원(高遠)하기를 힘쓰며 몸과 마음에 절실한 생각이 없이 옆으로 굽은 길을 달려간다면, 버려두고 게을리 하는 자와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치가 이미 밝지 못하니, 어찌 정치에 보탬이 있겠습니까.
5. 우리의 다짐
마음을 바르게 길러가는 일은 만사의 근본이니 매일매일 기도하며 기르기를 게을리 한다며 결국 하나님을 저버리게 되고 죽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
매일매일 기도하고 되새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성품을 배워가야만 한다. 하나님이 바로 내 마음 속에 오셔서 언제나 계셔야 만하는 것이며, 이를 저버려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멀어지고 세상의 것들이 내 마음을 지배한다면 나는 이미 사탄의 손에 빠진 것이며 죽어 천국에는 들어 갈 수가 없게 된다.
2020. 3. 9. 이 주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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