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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人格)의 성숙(成熟)을 바라보고

Abigail Abigail 2019. 2. 26. 14:26

인격(人格)의 성숙(成熟)을 바라보고

 

인격이란 사람으로서의 품격, 인간이 갖춘 품격을 이르는 말이라고 하겠다. 좀 더 현실적으로는, 인격이란 우리가 어떻게 보이느냐와 비교해서 우리가 정말 어떤 사람이냐를 말한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격의 성숙을 도모하여 가야함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1. 성경(Bible)이 말하는 인격성숙의 의미

 

성경(Bible)에서 말하는 하나님 교훈의 핵심은 사람이 진정한 위대한 것은 능력이나 지위가 아니라 '인격(Character)의 성숙'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성품, 품격을 배우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예수는 스스로 “겸손”과 "온유(gentleness)"를 말하였으며, 성령(Holy Spirit)을 받은 사람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안, 인내, 친절, 선함(goodness), 신실함(faithfulness), 온유(meekness), 절제(self-control) 이다.

진리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탁월한 능력이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사람들은 미술, 문학, 음악 또는 정치, 경제 등 제반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위대함의 증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런 능력의 소유자들을 높이고 칭찬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위대함은 이런 것들보다 더욱 깊은 것, 인격의 성숙이라고 가르쳤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인간의 위대함의 본질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위대함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주었는데, 그 핵심은 그가 말한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태복음 20장 26~27절)라고 한 것이다. 이런 예수의 말이 있기 때문에 위대함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며, 단지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매우 어려울 뿐이라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함"의 개념은 세상에서의 위대함의 철학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 ~ A.W.Tozer, ‘이것이 성공이다’ 중에서

인격이 성숙된 그리스도인의 주요 덕목(德目)으로 위의 성경말씀을 풀어 다음과 같이 해석하여 말할 수도 있겠다.

첫 번째 덕목은 분별력(discernment)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고 있으며, 무엇이 중요한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항상 잘못된 결정을 내릴 것이다. 어느 시대든 간에 최대의 도덕적 논쟁은 도덕적 이론의 차이가 아니라 분별력의 차이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분별력이라는 덕목은 사도 바울의 권면의 본질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장2절).

두 번째 덕목은 용기(courage)이다. 용기란 분위기가 거칠고 상황이 힘들어질 때 잘해낼 수 있는 힘이다. 용기란 유혹이 오고 고통이 찾아올 때 잘해내는 인격을 갖는 것이다. 아기가 우유를 먹으면서 깔깔거리고 좋아할 때는 어머니가 되는 게 쉽다. 그러나 아이가 치료할 수 없는 심한 장애로 고통당할 때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란 당신의 생명, 당신의 안전, 당신의 미래가, 당신이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 위협당할 때 잘해내는 힘이다. 구약성경은 ‘용기’라는 주제를 다양하게 다루는 하나의 교향곡이다.

세 번째 덕목은 절제(temperance)이다. 절제란 자신의 삶을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관리하고 제어하며 조율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자신의 삶을 제어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뜻이 아니다. 절제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통제권을 맡기며, 그 대신에 진정한 책임을 하나님이 주시는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절제하는 사람은 환경이나 물질이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제어하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의 제어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절제를 실천해야 한다.

네 번째 덕목은 정의(justice)이다. 정의로운 사람은 언제나 공정하기로 결심하여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알리면서 정의를 요구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act justly), 인자함(mercy)을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서 6장8절). ~ 루이스 스머즈, “기독교 교양”중에서

 

2. 인격의 성숙을 바라보고 ~ 성심(聖心)과 성학(聖學)

 

백강 이경여 선생은 일찍이 인격의 성숙을 이루어 가기 위한 핵심으로 크게 성심(聖心)과 성학(聖學)을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 아                래 ************************************

 

이른바 성심(聖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개 본심이 지켜지지 않으면 덥지 않아도 답답하고 춥지 않아도 떨리며 미워할 것이 없어도 노엽고 좋아할 것이 없어도 기쁜 법이니, 이 때문에 군자에게는 그 마음을 바루는 것보다 중대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잡히고 나면 덥더라도 답답하지 않고 춥더라도 떨리지 않으며 기뻐할 만해야 기뻐하고 노여울 만해야 노여우니, 주자(朱子)가 이른바 대근본(大根本)이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함양하는 방도도 불씨(佛氏)처럼 면벽(面壁)하거나 도가(道家)처럼 청정(淸淨)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발동되기 전에 지키고 발동된 뒤에 살피며 미리 기필하지 말고 잊지도 말아 보존해 마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비고 밝은 한 조각 마음이 그 속에 거두어져 있어 북돋는 것이 깊고 두터우며 이(理)가 밝고 의(義)가 정(精)하여 경계하고 삼가고 두렵게 여기는 것이 잠시도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근본이 이미 굳어져서 어느 것을 취하여도 본원(本源)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키고 버리는 사이에서 주재(主宰)하는 것이 없으면 마음이 이미 없는 것이니, 어찌 외물(外物)에 대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仁)을 숙련하는 공부가 어찌 일조일석에 되는 것이겠습니까.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천덕(天德)·왕도(王道)는 그 요체가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데에 있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홀로 있을 때를 삼가지 않아서 유암(幽暗)하고 은미(隱微)한 데에 문득 간단(間斷)되는 곳이 있다면 어떻게 날로 고명(高明)한 데에 오르겠습니까. 당 태종(唐太宗)이 일찍이 ‘임금의 한 마음은 공격받는 것이 많다. 조금이라도 게을리하여 그 하나만 받아들이는 날이면 위망(危亡)이 따른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그 자성(資性)이 밝고 트여 이 마음이 희미한 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인(聖人)의 극치(極治)라는 것도 결국은 이 길 외에 따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중주(中主)의 소강(小康)도 이를 빌려서 다스렸을 것이니, 다니기가 험한 산길에서 애쓰고 초목이 무성한 곳에서 배회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이른바 성학(聖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덕을 밝히려는 옛사람이 마음을 바루는 것을 근본으로 삼기는 하였으나, 본심의 착함은 그 체가 지극히 작은 반면 이욕(利欲)이 공격하는 것은 번잡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성색(聲色) 취미(臭味)와 완호(玩好) 복용(服用)과 토목(土木)을 화려하게 하고 화리(貨利)를 불리는 일이 잡다하게 앞에 나와 거기에 빠지는 것이 날로 심해집니다. 그 사이에 착한 꼬투리가 드러나 마음과 몸이 고요한 때는 대개 열흘 추운 중에 하루 볕 쬐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 학문을 강명(講明)하여 이 마음을 개발(開發)하지 않으면, 또한 어떻게 이 마음의 바른 것을 회복하고 이욕의 사사로운 것을 이겨 만화(萬化)의 주재가 되고 끝이 없는 사변(事變)에 대응하겠습니까.

이른바 강학(講學)은 장구(章句)나 구독(口讀)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인의 가르침을 깊이 몸받고 그 지취(旨趣)를 밝혀서, 자신에게 돌이켜 의리의 당연한 것을 찾고 일에 비추어 잘잘못의 기틀을 증험함으로써,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참으로 아는 동시에 미리 생각하여 익히 강구하고 평소부터 대책을 세워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경중을 재제(裁制)하는 일을 거론하여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신기한 것만 일삼고 고원(高遠)하기를 힘쓰며 몸과 마음에 절실한 생각이 없이 옆으로 굽은 길을 달려간다면, 버려두고 게을리하는 자와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치가 이미 밝지 못하니, 어찌 정치에 보탬이 있겠습니까. ~ 효종 4년(1653. 7. 2) 백강 이경여 선생의 “재변극복을 위한 21항의 상차문”중에서

 

3. 인격성숙의 열매

 

공자는 인격성숙의 주요한 열매로 서(恕)를 말하였다.

공자도 서(恕)에 대하여 이르기를 사람이 평생을 두고 실천하여야할 도리라고 하였다. 이 恕는 논어의 근본원리이기도 하다. 恕는 자기를 생각하는 것처럼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씨이다. 아울러 나 자신을 대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관대하게 대하는 마음씨이기도 하다.

恕에는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용서하고 자신이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에는 남의 탓을 하지 않는다는 뜻도 담겨있다.

실제로 우리들의 인생을 바꾸는 것은 큰일들이 아니다. 이웃에 대한 작은 배려나 보살핌이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된다. 사람들은 작은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다가 나중에 그 결과가 눈앞에 닥치고 나서야 후회하곤 한다.

결국 성숙한 인격으로 남을 위해 배려하는 것은 행복하고 성공하는 삶을 위한 필수덕목이라 하겠다. 남에 대한 배려가 없이는 자기 자신도 끝내 제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 ~ 김진홍 목사

성숙한 인격을 이루어 가는 것은 결국 "眞理와 이웃에 대한 아가페(Agape)적인 사랑"을 이루어가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생각된다.

 

2012.10.11. 이 주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