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위로의 벗이 되려면
오늘날의 사회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각박하고 삭막해져가 서로간의 참된 위로가 더욱 절실하며, 이로 인해 우리 사회는 인간미가 살아있는 더욱 살맛나는 세상이 될 수가 있겠다.
욥(Job)에게는 자랑스러운 친구가 셋 있었다. 욥이 재난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이 세 친구가 달려왔다.
욥기 2장 11-13절의 기록이다;
「*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그에게 이 모든 재앙이 임하였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처소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발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지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 밤낮 칠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그들은 욥에게 조문하고 위로하기 위해 찾아 왔다. 그들은 욥의 비참한 모습을 보자 일제히 소리를 지르고 통곡하고 옷을 찢고 티끌을 머리 위로 날리며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들은 욥과 칠일 주야를 같이 보내면서 입을 다문 채 잿더미 위에 앉아 있었는데, 여기에 좋은 위로의 벗이 되는 비결이 있다.
첫째, 좋은 위로의 벗이 되려면 자기 자신을 슬픔을 당한 친구와 동일시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은 최대한 욥과 비슷한 처지에 자신들을 두려고 애를 썼는데, 이것이 동일시하는 태도이다. 이기주의, 향락주의가 만연한 오늘날 사회에서 인간성의 회복은 고통을 당하는 자를 향한 관심의 회복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들을 찾아가고 함께 울어주고 땅바닥에 앉아 함께 있어주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이 동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본을 보인 위로의 방법이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은 영광의 옷을 벗고 우리와 똑같은 우리의 처지로 내려오셨다. 우리의 슬픔과 질고(疾苦)를 몸소 짊어지시기 위해서였다. 무슨 말이든 들어주고 껴안아주고 함께 울어주는 사람, 욥의 친구들처럼 하는 자들이라야 좋은 위로의 벗이 될 수 있다.
둘째, 좋은 위로의 벗이 되려면 침묵의 잠재력을 알고 있어야 한다. 세 친구는 처음에는 매우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욥을 위로하는데 말은 무익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 같다. 칠일 주야를 욥이 입을 열기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슬픔이란 단순한 서러움이 아니며, 무엇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오는 상실감에 대한 반응이다. 그래서 슬퍼하는 사람의 내면에는 극심한 갈등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슬퍼하는 자를 붙들고 일어난 일에 대해 많은 말을 하거나 단번에 무엇인가를 이해시키려고 강요하면 도움이 되질 않는다.
차라리 감정이 북받치는 대로 행동하게 다독거려주는 편이 낫다. 마음껏 울게 하자. 속에 있는 말들을 마음 놓고 털어 놓게 하자. 정서적으로 혼란을 격어도 탓하지 말자. 본래 ‘위로’란 말의 뜻이 ‘몸을 흔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같은 슬픔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표정으로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슬픔, 고통을 성경이나 고전의 몇 구절이나 그럴듯한 말 몇 마디로 쫓아버리거나 녹여 버릴 수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슬픔, 고통은 피해야할 무엇이 아니라 터널과 같아서 일단 들어가면 통과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의 터널 속에서 사람들에게 위로가 필요하며 우리의 위로는 단지 그 슬픔의 터널을 잘 통과하도록 돕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침묵은 말이 전할 수 없는 것을 가져다 줄 수가 있다. 욥의 세 친구는 입을 열지 않았을 때 아주 좋은 위로의 벗이었다. 그래서 “침묵은 금이다.”라고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그들이 함부로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 위로하는 벗이 아니라 핍박자로 변하고 말았다.
욥기 19장 21-22절의 기록이다;
「*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몸이 이 꼴인데도 아직도 성에 차지 않느냐?」
고통과 슬픔을 당한 그들은 말이나 지식이 필요한 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의 슬픔을 치료할 수 없고 단지 도와줄 수 있을 뿐이다. 치료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니, 하나님의 사랑이 치료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말씀 안에서 우리들로 하여금 능히 모든 고통, 슬픔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는 참된 벗이 될 수 있게도 하신다. 위로하는 벗이 되기 이전에 우리도 하나님을 닮아서 그들을 참으로 사랑하는 벗이 되어야 하겠다.
2017. 9.14. 이 주 관 (241124 일부보완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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