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회한을 딛고서
조선조 효종8년(1652년) 임금은 청나라의 압력으로 영의정에서 물러나 부여에 낙향하고 있는 백강 이경여 선생의 북벌계획 추진에 관한 상소에 다음의 글로 답하였다.
誠以至痛在心(성이지통재심) 有日暮途遠意(유일모도원의)
정성을 다하여 바른 뜻을 이루고자 하나 (어려운 현실로 인하여) 지극한 아픔이 가슴에 있는데, 날은 이미 저물고 성취를 향한 길은 멀기만 하구나 !
병자호란 패전후 소현세자, 봉림대군(훗날의 효종)과 백강 이경여 선생, 청음 김상헌 선생 등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갖은 고초를 격고 귀국하신 후에,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 하시고 백강 이경여 선생은 영의정이 되어 은밀히 북벌계획(北伐計劃)을 도모하시었습니다.
그러나 척화신을 배격하는 청의 압력으로 백강 이경여 선생은 현직에서 물러나시어 백마강변의 백강마을로 낙향하시게 되면서 후사를 우암 송시열 선생에게 위탁하시게 되었고, 이후 백강 이경여 선생이 효종에게 북벌계획 추진에 관한 상소를 올리자, 당시의 상황이 매우 어려운바 효종임금이 필생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아쉬움을 위의 글로 답하고 있는데, 이는 이어 있을 효종의 승하로 인한 북벌 계획의 실패를 예고하고 있는 듯도 합니다.(이글은 훗날 우암 송시열선생이 “至痛在心 日暮途遠”으로 줄이어 쓰고 소재 이이명 선생이 백마강변 대재각내 바위에 새겨 놓았음)
여기에서 우리는 효종대왕과 백강 이경여 선생 우암 송시열 선생 등이 필생의 과업으로 여긴 북벌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지극한 아픔과 한(恨)을 가슴에 품고(至痛在心) 이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에 후손인 우리들은 이를 거울삼아 이러한 회한의 한평생을 마감하지 아니하도록 삶의 좌표를 바르고 명료하게 정립하여가고 부지런히 실천하여가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현세를 넘어 내세에서까지도 이루는 삶의 비젼(Vision)을 바라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나라의 성리학도 이러한 내세에서의 비젼을 바라보는 데에 더욱 정진하여야 하리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기독교의 무서운 힘의 원천은 바로 이 내세에 대한 확고한 비젼과 소망을 심어 줌으로 인하여 현세의 모든 문제와 고난들을 기쁘고 평안한 마음으로 극복하여 가도록 하는 데에 있다할 것입니다.
2. 대재각
부여 대재각 [扶餘大哉閣]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진변리(津邊里)에 있는 정자로 1700년(숙종 26)에 지어졌다.
규암면 진변리(津邊里) 백강마을 동쪽에 있는 정자로 부산 각서석(浮山刻書石,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7호)을 보존하기 위해 세웠다.
부산 각서석은 백강 이경여(白江 李敬輿)가 북벌에 관해 효종에게 올린 상소에 대해 효종이 답한 글귀 중에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지통재심(至痛在心)’, ‘일모도원(日暮途遠)’ 8자를 써서 이경여의 아들 민서(敏敍)에게 전한 것을 1700년(숙종26)에 손자 이명이 바위에 새긴 것이다. 이를 보존하기 위해 정자를 짓고 《상서(尙書)》의 "대재왕언(大哉王言:크도다 왕의 말씀이여)"에서 이름을 따 대재각(大哉閣)이라 하였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경사진 자연암반을 정리하고 세웠다. 돌기둥을 높이 세워 그 위에 원통형의 기둥을 올렸으며, 4면은 홍살로 처리하였다. 팔작지붕에 익공(翼工) 양식으로 되어 있다. 정자 안에는 대재각중수기(大哉閣重修記)와 운한대기 등 2개의 기문이 걸려 있다.
3. 추모시
가야할 길은 먼데
-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與) 선생을 기리며
백마강 강변, 잔잔한 물결이 유유히 흐르는데
대재각(大哉閣) 높은 곳에, 도모하신 북벌계획(北伐計劃) 장엄하도다
사공아 노 저어라 큰 꿈을 향해, 백강상공(相公) 나라사랑 이어 받으리
백마강 강변, 멀리 낙화암의 서글픈 자태 아득한데
병자호란 오욕(汚辱)의 날들 회한(悔恨)이 사무친다.
사공아 노 저어라 큰 꿈을 향해, 대재각(大哉閣) 암벽아래 희망을 보네
백마강 강변, 물새도 울며 나는데
일모도원(日暮途遠) 지통재심(至痛在心)! 눈물이 솟구친다.
사공아 노 저어라 큰 꿈을 향해, 효종임금 높은 뜻 잊힐 리 없네
2006.10.7. 12대손 이 주 관
o 지통재심 일모도원(至痛在心 日暮途遠) : 병자호란 후 淸國의 압력으로 영의정에서 물러난 이경여 선생이 부여 백마강변에서 효종임금에게 다시 북벌계획 추진에 관한 상소를 올리니. 효종임금이 백강상공에게 답한 글로 북벌계획을 상징하는 글로 쓰여 왔으며, 그 뜻은 “지극한 아픔이 가슴에 남았는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아직도 멀구나!”이며, 북벌계획의 어려움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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