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문화수준의 高揚
지통재심 일모도원(至痛在心 日暮途遠)”이라는 말은 조선조 효종대왕이 청나라의 압력으로 領相에서 물러난 백강 이경여 선생에게 답한 글로, 병자호란 패전 후 나라를 부흥시켜 예전의 영토를 회복하고자 북벌(北伐)을 도모하려는 큰 뜻을 같이 공유하였으나, 이후에 다가온 현실적인 실현의 어려움을 표현한 말로, 후세에는 북벌계획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어왔다.
1. 지통재심 일모도원[至痛在心 日暮途遠]의 배경과 교훈
훗날 우암 송시열 선생은 조정에서 이 말의 배경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현개 19권, 현종9년(1668 무신 / 청 강희(康熙) 7년) 10월 30일(을미)
판부사 송시열이 아뢰기를,
공자가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의 효를 칭찬한 것은 뜻을 계승하고 사업을 잇기를 잘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선왕(효종)께서는 대성인(大聖人)으로서 때를 잘못 만나셨으나, 천하에 대의를 밝히고자 하신 것이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았습니다.
고 정승 이경여(李敬輿)가 ‘국력은 미약한데 상의 존심(存心)이 너무 지나치니, 일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도리어 화를 자초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선왕께서 ‘마음이 매우 통분스러운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어 탄식만 난다(至痛在心 日暮途遠)’고 답하셨습니다. 대개 선왕의 뜻은 비록 화를 부르더라도 그만둘 수가 없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고 하는 것은 나의 일은 큰데 나이가 이미 늙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선왕의 춘추가 바야흐로 강성하셨는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탄식을 무엇 때문에 하셨겠습니까. 신은 매양 이 분부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매우 비통스럽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반드시 선왕의 뜻을 잘 이어야 효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략~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7책 629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역사-고사(故事)
그러나 이후 백강공과 효종대왕 모두 일찍 돌아가고 북벌계획은 더 이상 추진되지 못하고 말았다.
당시 기본적으로 민생의 안정, 나라의 평안과 국력의 신장 등이 지난 세종대왕 때와 견주어 보면 현저히 회복되지를 못하였다.
우선 조정에는 붕당(朋黨)의 씨가 상당히 뿌리 깊이 내려져 오고 있었으며 나라 안에 부패가 만연하고 기강이 크게 문란해진 상태로 지속되고 있었다. 당시 많은 이들은 백강 이경여 선생이 신망 높은 원로대신으로 나라를 재건해 갈 것을 기대하였으나, 공은 곧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백강공이 지속적으로 나라의 정치를 주도해 갔더라면 나라가 중흥의 길로 나갔을 것으로 보았다 (백강 이경여 선생 신도비명 참조).
여기에는 오늘날 우리들이 교훈으로 삼아야할 점이 있다.
한, 두 사람 인물이 세상을 떠남으로 인하여 나라의 기본정책과 운명이 바뀌는 취약한 구조에서 벋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민들 각자가 바른 자세로 깨어있고, 식견과 역량을 길러 나가야 한다고 본다.
그리 하자면 나라의 기본 교육이 바르게 자리 잡아 가야만 할 것이다. 세종대왕이 삼강행실도를 전국에 그리고 써서 붙이고 가르치며 널리 편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이러한 국민계도의 필요성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오늘날 서구 선진국들은 그들의 기본정신이던 청교도(Puritans)의 훌륭한 정신을 벋어나 탐욕에 빠지고 타락함으로 인하여 흔들리고 있다. 일본은 단결하여 경제 선진국까지는 이루었으나 낮은 정신문화수준과 미신 위주의 종교들이 횡행함으로 기반이 취약하여져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중국은 엄청난 인구수에 힘입어 경제볼륨은 키웠으나 역시 정신문화의 기둥이 무너지고 건전한 종교들도 자리 잡지 못하는 낮은 정신수준으로 인하여 실질적인 국민들의 삶의 질은 형편없으며 장래는 불투명하고 불안해 보인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정신문화의 수준은 과연 어떠한가? 우리도 기본이 흔들리고 여전히 문제가 많으니, 좀 늦은 감이 있으나 이제는 본격적으로 깊이 살펴보고 개선해 나아가야한다.
안으로는 훌륭한 선조님들의 사상과 정신을 이어 받고 한편으로는 세계적 시야로 진리를 탐구하고 받아들이며 이들을 서로 융화시켜 시너지 효과를 내는, 수준 높은 국민정신의 토양을 세우고 길러 나가야 한다고 본다.
나의 견해로는 우리 역사상 탁월한 세종대왕의 훌륭한 정신과 사상, 그 실천력을 기본으로 이어 받고, 이에 서구선진국들의 발전토양이 된 청교도 정신(Puritanism, Protestantism)을 발전적으로 수용하여 한 단계 높은 국민정신을 만들고 널리 펴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아울러 유학, 불교, 도교, 유태교, 이슬람교, 동서양의 주요 철학 사조 등도 늘 연구하며, 기본과 융화될 수 있는 좋은 점들은 지속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사고가 필요하다고 본다.
세종대왕의 두루 탁월하신 정신 중에서도 이웃 사랑의 정신 즉 “애민정신[愛民精神]”이 근간을 이루어야한다고 생각된다. 이에 애민정신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고자한다.
2. 애민정신[愛民精神]
근래의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의 흐름 속에는 이웃 사랑의 정신, 애민의 정신 보다는 시류에 영합하고 인기에 영합하며 개인의 목전 이해에 쏠리는 포퓰리즘(populism)같은 흐름이 많이 감지된다. 좀 모질게 말하면 천박스러운 사회문화로 흘러들어가는 경향으로 느껴진다.
미국의 저명한 Rick Warren 목사는 오늘날 미국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미국인들이 深遠한 진리는 뒤로한 체 “천박한 시민의식(shallow minded culture)”에 빠져가고 있는데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에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자세로 세종대왕과 백강 이경여 선생의 깊은 애민정신을 돌아보고 오늘날의 세태를 개선하여 가는데 기본적인 지표로 생각하여보고자 한다.
이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과도 궤도(軌道)를 같이하는 정신이라 하겠다.
1). 세종대왕의 애민정신
한 나라의 통치자가 당대에 자신이 평가받을 치적보다는 100년 300년, 천년 후를 생각하며 온전히 백성을 위해, 백성을 위한 정책을 입안하고 펼친다면 그 통치자는 제왕을 넘어 신 에 버금가는 존재로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최근 한글창제의 위대함을 일깨워주고 있는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가 그동안 잊고 있던 세종대왕의 치적들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해 준다. 그리고 그의 업적들이 이 시대에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지를 돌아보게 한다.
폭력은 약한 자들의 통치수단이다.
드라마 속에서 세종은 한글창제를 거세게 반대하는 사대부들과 끊임없이 토론하고 대화한다. 세종이 아닌 역대의, 혹은 오늘날의 다른 왕이었다면 왕의 의견에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대화와 토론이 아닌 물대포나 칼로서 단숨에 저지하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 대화와 토론 속에 세종의 통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왜 폭력은 안 되는 것인지. 왜 백성들에게 배우기 쉬운 글자가 필요한 것인지.
그는 아버지 태종이 물리적인 힘을 이용해 백성과 신하들을 규합하고 다스리는 일에 깊은 죄의식을 느낀다. 권력을 갖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폭력을 이용하는 아버지에 대해 분노하면서 군주로서 자신만의 조선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 뼈아프게 고민한다.
그가 생각하는 ‘폭력’은 가장 쉬운 통치방법이다. 그는 그 쉬운 방법을 과감하게 버리는 것에서 부터 출발한다. 그는 잠을 자지 않으며 책을 읽고 농사, 과학, 음악, 조세, 법률, 약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 연구를 직접 진두지휘한다. 그가 연구한 많은 학문들은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실제 생활에 응용하고 적용하며 쓰이도록 한다. 그 과정에서 많은 신하들의 반발에 부딪치지만 그는 대화와 토론의 시간을 주기적으로 가지며 신하들을 설득한다. 자신의 정책을 반대한다고 신하들을 벌하지 않는다. 그는 서둘지 않는다. 한번 설득해서 되지 않으면 두 번 세 번이고 반복해서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그의 이러한 정신은 공정함에서 출발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고 다른 생각을 펼칠 수 있다는 것. 인간을 상하의 개념이 아닌 평등의 개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폭력은 오히려 약한 자들의, 우둔한 자들의 야만스러운 행동일 뿐이다.
그런 세종대왕은 백성을 다스리는 마음가짐도 다르다. 힘없고 가난하고 불쌍한 백성이 평생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며 불행하게 살기 보다는 옳고 그른 것을 말할 수 있고 자신들의 행복과 발전을 추구하기를 바란다. 서로 싸우고 토론하고 경쟁하더라도 정체돼 있는 삶 보다는 한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 현재 보다는 미래가 더 나은 삶이 돼 주기를 바란다.
과거에 응할 수 없다고 그것에 순응하며 살기 보다는 자신들도 공부해서 그들의 권리를 스스로 쟁취해 나가기를 바란다. 그것이 당장은 어렵겠지만 세월이 흘러 백성 스스로에게 자신들만의 고유한 자아가 생긴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가 백성을 불쌍히 여겨 오랜 세월 밤잠 못 자가며 만든 글자, 한글의 창제 목적이다.
세종대왕은 한글이 반포된다 해도 당장 백성의 삶이 달라질 것이라 바라지 않았다. 그는 당대의 눈에 보이는 성과를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100년 후, 300년 후, 천년 후를 기대했다. 백성들이 한글을 통해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키게 될 것이라 믿었다. 당장은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세월이 흘러 모든 백성들이 쉬운 한글을 쓰고 익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면, 모든 백성이 글을 읽고 생각을 표현하는 날이 온다면, 백성의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 믿었다.
세종대왕은 그의 보이는 업적보다 깊이 느껴진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신분차별과 가난의 대물림과 모든 불공평에서 백성이 비로소 평등하게 기회를 가질 수 있는 백성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꿈이었고 그 꿈은 당대에 이뤄지기 보다는 후대를 기약한 것이다. 이것이 세종대왕과 다른 모든 통치자들과 다른 점이다. 과연 어느 통치자가 자신의 공적을 당장 내세우지 않고 천년 후를 기약할 수 있단 말인가. 5년, 혹은 7년이라는 짧은 재임기간 동안 수많은 업적을 남겨 그 공적을 인정받고 싶은 오늘날의 통치자들을 생각하면 비교조차 되지 않는 일이다. 그가 남긴 엄청난 눈에 보이는 업적보다도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마음으로만 느껴볼 수 있는 그의 애민정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눈물겹다.
2011.12.04. 김정애 논설위원, 충청매일(http://www.ccdn.co.kr)
2). 백강 이경여 선생의 애민정신
백강 이경여 선생은 백성을 사랑함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상언하였다. 인간들 사이의 관계로 말하면 이보다 더 크고 헌신적인 사랑이 있겠는가? 오늘날 우리들이 이웃을 부모형제처럼 사랑하는 마음들이 된다면 참으로 살기 좋은 나라를 이룰 것이다.
이른바 애민(愛民)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이 백성을 대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것과 같은데, 자식이 굶주리고 추우면 부모로서 예사로 여기는 자가 있겠습니까. 신은 아직도 경인년762) 의 수교(手敎)를 기억합니다. 송(宋)나라 조후(曺后)가 ‘천하에 이롭다면 내가 어찌 머리털이나 피부를 아끼겠느냐’고 한 말을 인용하셨으니, 본말과 경중의 구분을 전하께서 이미 스스로 아셨다고 하겠습니다. 예전에 명(明)나라 인종 황제(仁宗皇帝) 때 봉사(奉使)하고 강회(江淮)에서 돌아온 자가 기근을 말하니, 드디어 강관(江關)의 수백만 섬의 쌀을 내어 구제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사농(司農)과 의논하기를 청하였으나, 인종이 ‘유사(有司)가 걱정하는 것은 경비(經費)이니, 함께 의논하면 일이 시행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참으로 선인(宣仁)763) 의 마음으로 인종의 정치를 행한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하동(河東)에서 곡식을 옮기는 것으로 마음을 다하였다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심각한데 해결책은 미미해서 구제하는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해마다 잇따라 흉년을 만나 홍수와 가뭄이 서로 이었는데 다행히 이제 씨 뿌리는 시기를 잃지 않고 비도 조금 내려서 추수할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해묵은 기근 끝에 미납된 조세가 참으로 많고 공사(公私)가 곤궁하여 곡식을 화매(和賣)한 것이 필시 배로 늘어났을 것이니, 옛사람이 풍년의 폐해가 흉년보다 심하다고 한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신이 지금 미리 아뢰는 것은 전하께서 이 점에 유의하여 유사의 청에 대비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정사가 위에 달려 있는 것이기는 하나 봉행하는 책임은 실로 백성을 기르는 수령에게 있습니다. 한 선제(漢宣帝)는 이천석(二千石)764) 이 나와 함께 다스린다 하였고 당 태종(唐太宗)은 영장(令長)의 이름을 병풍에 써 두고 늘 보았으니, 백성을 사랑하는 요체를 알았다 하겠습니다. 더구나 대읍(大邑)·대도(大都)는 나라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호남(湖南)의 전주(全州)·나주(羅州)·영암(靈巖)·남원(南原)과, 호서(湖西)의 충주(忠州)·청주(淸州)·공주(公州)·홍주(洪州)와, 영남(嶺南)의 경주(慶州)·상주(尙州)·진주(晋州)·안동(安東)과, 기타 제로(諸路)에 있는 각각 번요(煩要)한 곳은 마땅한 사람이 아니면 백성이 그 폐해를 받을 뿐더러 불행히 변을 당할 경우 어디를 믿겠습니까. 신중히 선임하는 법을 더욱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묘당(廟堂)을 시켜 전관(銓官)과 함께 의논하여, 반드시 시종(侍從)에 출입하고 명성과 공적을 이미 나타내고 꼿꼿하고 재국(才局)이 있는 선비를 가려서 반드시 의의(擬議)하게 하고, 해조로 하여금 정사 때에 가려 차임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단 마땅한 사람을 얻은 뒤에는 인재를 양육하기를 아울러 요구하여 반드시 호령(湖嶺)이 예전처럼 번성하도록 한다면, 반드시 정사 때에 임박하여 구차하게 채우는 식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영인본】 35책 633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王室) / *윤리(倫理)
[註 762]경인년 : 1650 효종 원년. ☞
[註 763]선인(宣仁) : 송 조후(宋曺后)의 시호. ☞
[註 764]이천석(二千石) : 자사(刺史). ☞
~ 효종 4년 (1653년) 7월2일 백강 이경여 선생의 “재변극복을 위한 상차문” 중에서
2012. 8.22. 이 주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