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Abigail Abigail 2022. 1. 18. 13:32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지난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집안이나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 유대인이 세운 이스라엘의 긴 역사와 그들의 깊고도 변함없는 역사의식과 이를 바탕으로 이룬 그들의 번영을 보면 참으로 감회가 깊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은 지난 70여 년간의 평화와 경제적인 번영에 도취되어 조상님들의 훌륭한 가르침과 인륜도덕을 지나치게 소홀히 하고 자유 정의 진리의 정신교육에 힘쓰지 못한 결과 오늘날에 이르러 탐욕주의가 팽배하고 전체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면서 참으로 혼란스럽고 무고한 사람들이 죽거나 피해를 입는 등 매우 살기 어려운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OECD국가들 중에서 최고의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지난 우리의 역사에서 배우는 것을 매우 소홀히 하고 있으니 통탄스러운 일이다.

 

지난날 경종 때 벌어진 신임사화(辛壬士禍)는 탐욕의 무리들이 거짓 모함으로 일으킨 참혹한 사화(士禍)로 노론 사대신을 비롯한 수백 명 의 충신들이 무고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하늘은 결코 무심하지 않아 40년이 지난 후에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고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섬으로 영조·정조의 부흥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었다. 이에 대한 국조보감의 기록을 살펴보자.

 

영조1년(을사, 1725년) 1월

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이명(李頤命)ㆍ이건명(李健命), 우의정 조태채(趙泰采)의 관작을 회복해 주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또 고 판서 이만성(李晩成) 등의 신하들도 모두 관작을 회복해 주었다.

처음에 경종이 편찮은 상황에서 후사(後嗣)가 없자, 김창집 등 여러 대신이 경종에게 아뢰어 자전에 여쭈어 상을 왕세제로 책봉하도록 하였다. 이에 적신(賊臣) 유봉휘(柳鳳輝)ㆍ조태구(趙泰耈)가 김일경(金一鏡) 등과 서로 앞뒤로 상소를 올려 김창집 등을 터무니없는 사실로 얽어 넣어 이로써 저궁(儲宮)까지 핍박하려 하였다. 끝내는 목호룡(睦虎龍)을 사주하여 무옥(誣獄)을 일으켜 살육을 멋대로 행하였는데, 김창집 등의 대신 및 이만성 등의 인물이 모두 참화를 입게 되었다.

이때 이르러 우의정 정호(鄭澔)가 상차(上箚)하여, 당시의 옥안을 검열하여 이미 죽은 자는 억울함을 풀어주고 귀양가 있는 사람은 놓아주기를 청하였다. 상이 비답하기를, “네 대신이 억울함을 당한 것을 어찌 차마 말로 할 수 있겠는가. 부르짖은 자는 역적 김일경이고 응한 자는 역적 목호룡이다. 선대왕의 깊은 어짊과 후한 은택이 아니었다면 그 사단이 어찌 이 정도뿐이었겠는가. 그렇긴 해도 이 일은 중대하니 한 번의 비답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대신, 2품 이상, 삼사가 빈청(賓廳)에 모여 국안(鞫案)을 자세히 검열해 본 다음 등대(登對)하여 품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입시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순(大舜)이 사흉(四凶)을 죽이자 천하가 복종하였는데, 지금의 원악(元惡)은 김일경에 지나지 않는다. 목호룡과 함께 체결하고 화응하여 큰 옥사를 속여 일으키고 낭자하게 참벌(斬伐)을 가하였다. 숙종이 의지하던 대신과 맡겨 부리던 신하들이 아울러 도륙되었고, 그 밖에 장(杖)을 맞다가 죽은 사람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천지 사이에 지극한 원통함이 맺혀 있는데 화기(和氣)가 이로 인하여 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오늘 억울함을 풀어주는 거조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를 인하여 또 주륙을 가한다면 이는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곧 보복하는 것이 된다. 경들은 이러한 뜻을 유념하여 공평하게 하도록 힘쓰라.”하고, 마침내 네 대신에 대해 관작을 회복해 주고 치제하도록 한 것이다.

이윽고 또 하교하기를, “네 대신은 나라를 몸 받는 정성으로 두 조정을 잇따라 섬겼는데, 끝에 가서 독기를 부리는 자들에게 피해를 입었으니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프다. 이제 처분이 이미 정해져 네 대신이 입었던 참혹한 무고도 다 씻겼으니 어찌 선조(先朝)의 남기신 뜻을 따른 것일 뿐이겠는가. 또한 너그럽고 훌륭했던 대행조(大行朝)도 반드시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에서 기뻐하고 계실 것이니, 이는 오늘날에만 할 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뒷날에도 장차 돌아가 양조(兩朝)에게 아뢸 말씀이 있게 된 것이다. 이미 관작을 회복해 주었으니, 즉시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하라.”하였다. 이에 김창집에게는 충헌(忠獻), 이이명에게는 충문(忠文), 이건명에게는 충민(忠愍), 조태채에게는 충익(忠翼)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다시 유생들의 상소를 인하여 서호(西湖)에 사당을 세우고 사충사(四忠祠)라고 사액(賜額)하였다.

6월. 태학생 정유(鄭楺) 등이 상소하여, 신임사화 때 무고에 주도적으로 가담한 조태구(趙泰耈)ㆍ유봉휘(柳鳳輝)ㆍ최석항(崔錫恒)ㆍ이광좌(李光佐)ㆍ조태억(趙泰億) 등의 죄를 다스리도록 청하였는데, 말이 대부분 너무나 곧았다. 상이 정유를 불러 엄히 꾸짖었는데, 정유가 주장을 꼿꼿이 말하여 굽히지 않았다. 상이 매우 노하여 상소문을 땅에 던지고 위엄을 떨쳐 죄가 장차 불측한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정유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더욱더 곧은 말을 아뢰었다. 상이 이에 노여움을 조금 풀고서 비로소 도배(島配)를 명하였다. 곧 이어 하교하기를, “상소를 올린 유생이 지척의 위엄 아래에서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음을 보고서 삼백 년 동안 배양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예전에 성종조 때, 대내(大內)에서 신사(神祀)를 성균관에서 행하려 하자 성균관 유생들이 몰아 쫓아냈다. 이에 성종이 기뻐하며 이르기를, ‘선비들의 기상이 이러한데 내가 다시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하였다. 지금 정유에 대하여 그 굴하지 않았던 점을 내 가상히 여기는 바이다.” 하고, 도배하라고 한 명을 도로 특별히 거두어들였다. 이어 따스한 비답을 내렸다. <국조보감 제57권 에서>

 

오늘날 탐욕에 눈이 어두워 짧은 소견으로 남을 모함하고 거짓으로 선동하며 나라를 어지럽히는 이들은 반드시 이런 우리의 역사를 잘 살피고 배워서 두려워 할 줄 알아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22. 1.18. 素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