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과 직언
충성과 직언 ~ 간쟁(諫諍)하는 자는 배신하지 않는다
정치학자 해럴드 래스키(Harold Joseph Laski)는 ‘건전한 충성은 수동적이거나 현실 안주형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비판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조직이나 나라나 발전하려면 충성과 직언이 없으면 결코 이루어 질 수가 없다. 이와 관련하여 백강 이경여 선생의 말씀을 들어보자.
“뭇 신하의 곡직(曲直)을 알려면 반드시 아첨하는 자를 멀리하고 충직한 자를 가까이하며, 강직하고 방정한 말을 좋아하고 순종하고 예쁘게 보이려는 꼴을 미워할 것이며, 종종걸음으로 쫓아다니면서 맞추는 것을 공손하다고 여기지 말고 직언으로 간하고 물러나기 좋아함을 거만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을 요령으로 삼아야 합니다. “
~ 백강 이경여 선생이 효종대왕께 올린 上箚의 말씀 (1652년 효종3년 10월25일) 중에서
“이른바 아첨을 멀리해야 한다[遠讒佞]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간사한 무리는 흔히 임시변통하는 술수가 넉넉하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꾀가 넉넉하나 오직 그 마음먹는 것이 바르지 않으므로 착하려 하지 않고 악하려 하며 충직하려 하지 않고 속이려 합니다. 따라서 참으로 호오를 밝히고 정상을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어떻게 우정(禹鼎)771) 에서 이매(魑魅)를 가려내고 일월(日月)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사라지게 하겠습니까. 오늘날의 조정은 임금의 덕이 청명하고 뭇 인재가 모여 나오므로 아첨하는 폐해를 성대(盛代)에서 논할 것은 아닙니다마는, 임금은 높고 깊은 데에 있으므로 듣고 싶은 것은 바깥의 말이고, 임금은 위세가 무겁고 크므로 늘 좋아하는 것은 아첨하는 무리이니, 세상을 다스리는 근심에 어찌 단주(丹朱)와 같지 말라는 경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절의(節義)를 위하여 죽을 사람은 싫어하는 낯빛을 무릅쓰고 감히 간언(諫言)하는 사람 가운데에서 찾아야한다.’ 하였으니, 임금이 이것을 알면 얻은 것이 벌써 많은 셈입니다.
무릇 아첨하는 자는 반드시 임금의 의향을 엿보아 뜻을 미리 알아서 받들고, 임금의 마음이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을 헤아려 곡진히 헐뜯거나 칭찬하며, 기세(氣勢)가 좋은 자에게는 기어 붙어 결탁하고 정직한 자에게는 겉으로는 칭찬하되 속으로는 배척하는 등 정태(情態)가 은밀하고 계책을 쓰는 것이 여러 가지이니, 받아들일 즈음에 그들의 행동을 살피고 치우치는 내 마음을 끊으면 영예(英睿)가 비추는 바에 자취를 숨길 자가 없을 것입니다.“
[註 771]우정(禹鼎) : 우 임금이 구주(九州)의 금을 모아 주조했다는 솥.
~ 효종 4년(1653년) 7월 2일 영중추부사 이경여가 올린 재변을 이겨내는데 힘써야할 21항의 상차문 중에서
이와 관련하여 논설위원 이가환은 다음과 같이 찾아 적고 있다.
“아첨하는 자는 충성하지 못한다. 간쟁하는 자는 배신하지 않는다”(<목민심서>). 다산 정약용의 말이다. 성호 이익은 “바른말을 하고 극진하게 간언하는 신하야말로 국화(國華·나라의 권위와 위엄)”(<성호사설>)라고까지 치켜세웠다.
그렇다면 직언, 즉 곧은 말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1450년(문종 즉위년) 사헌부 장령 신숙주는 “언로(言路)는 인체의 혈맥과 같은 것”이라면서 “언로가 뚫리지 않으면 나라에 큰 병이 생긴다”고 했다.(<문종실록>) 여말선초의 대학자 권근은 “지나친 직언을 했다 해서 벌을 주면 언로가 막히고 결국 나라와 군주는 멸망에 이른다”고 했다(<양촌집>). 그랬기에 역대 군주들은 과할 정도로 직언을 구했고, 신하들은 죽을 각오로 군주를 다그쳤다.
한나라 창업공신인 주창은 황제(고조 유방)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지만 황제를 향해 서슴없이 “걸주와 같은 폭군입니다”라고 외쳤다. 유방이 맏아들 대신 애첩의 아들을 태자로 올리려 하자 직언한 것이다. 말을 심하게 더듬었던 주창의 다음 한마디가 청사에 길이 남는다. “기, 기, 기어코 그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期期期知其不可)”(<사기> ‘장승상열전’).
당나라 태종은 어느 날 불같이 화를 내며 조회를 일찍 파했다. 재상 위징의 직언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내전에 들어온 태종은 “나를 욕보인 그 자를 죽이겠다”며 길길이 뛰었다. 그러자 부인인 문덕황후가 되레 “축하드립니다”라고 하례했다. 당 태종이 이유를 묻자 문덕황후는 “군주가 명철하고 신하가 정직하다는 뜻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조선시대 가뭄이 극심했던 1690년 숙종은 직언을 구하는 교지를 내린다(<숙종실록>). “임금이 부덕한 탓이다. 가여운 백성이 죽어가는데 차라리 죽고 싶다. 임금의 잘못을 숨김없이 아뢰라. 어떤 말이라도 벌하지 않겠다.”
재변에 임하는 임금들의 태도가 이렇게 저자세였는데도 대신들의 다그침에는 관용이 없었다.
1650년(효종 1년) 영의정 백강 이경여는 “전하가 초심을 잃고 도량이 좁은 탓에 가뭄이 일어난 것”이라고 직언을 퍼부은 뒤 사퇴의 뜻을 전했다. 그러자 효종은 “무능하다고 날 버리는 거냐. 날마다 직언을 올리고 내 허물을 고치게 하라”(<효종실록>)며 뜯어말렸다. 이것이 우리가 깎아내리기 일쑤인 ‘왕조시대’의 으뜸 덕목인 신하의 ‘직언’과 임금의 ‘소통’이었다.
~ 경향신문 2015. 7.14.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에서
직언과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은 높은 인격적 소양이 필요하므로 리더를 세울 때에는 반드시 그 사람됨과 인격의 성숙도를 깊이 살펴보아야한다.
2020. 4.19. 이 주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