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의주부윤 황일호 선생 유지(遺志) ~ 이직부에게〔李直夫〕, 낙전당 신익성 선생

Abigail Abigail 2020. 2. 26. 10:23

의주부윤 황일호 선생 유지(遺志) ~ 이직부에게李直夫, 낙전당 신익성 선생

 

이달 초 묘사(墓舍)에서 황 부윤(黃府尹)이 화를 당할 위기에 놓여 몹시 위태롭다는 말을 듣고 서울로 달려갔는데, 부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갖가지로 계책을 내었지만 일이 끝내 불행하게 되었으니 하늘의 뜻입니다.

 

부윤은 대부(對簿)할 때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형장에 나아가서도 변치 않고 평소처럼 조용히 담소하였습니다. 머리카락을 정돈하고는 북쪽을 향해 네 번 절을 하고 남쪽을 향해 두 번 절을 하였으니, 임금과 어버이에게 하직하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옥리(獄吏)를 불러 한두 친구에게 말을 전하게 하여 뒷일을 부탁하였습니다.

 

그가 말한 내용은 노모를 보호하는 것 외에 문민공(文敏公 황일호의 부친 황신(黃愼))의 묘소를 부인의 묘역으로 옮기는 것과 생부(生父 황척(黃惕))의 묘를 근처에 잡은 길지(吉地)로 옮기는 것, 그리고 자신의 시신을 안씨(安氏 황일호의 첫 번째 부인)와 합장하는 것 세 가지 일에 대한 분명한 유언이었습니다. 감옥에서 나와 죽으러 갈 때 봉서(封書) 한 통을 군관에게 맡겨 승정원에 바치도록 하였는데, 도승지가 밀갑(密匣)에 넣어 바쳤으니 임종을 앞두고 올린 글인 듯하였으나 끝내 무슨 말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벗에게 기개와 재주가 있다는 것은 원래 알고 있었지만, 정신과 식견이 이처럼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줄은 헤아리지 못했으니, 평소 곡진하게 알지 못했던 것이 부끄럽습니다.

 

지금 그의 고아와 과부가 영구를 모시고 남쪽으로 돌아갔으니 그의 분명한 유언과 어긋나는 듯하지만, 그의 집안에서는 부여(扶餘)의 집 뒷산이 길지이므로 장사 지낸 뒤에 차례로 이장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분명한 유언을 변함없이 지켜야 한다고 다투지 못한 것은 형세상 그런 것이지 죽은 벗을 저버려서가 아닙니다. 집 뒷산이 과연 길지라서 이장할 수 있다면 매우 좋겠습니다. 모든 일을 애형(哀兄)의 지시대로 하여 고아와 과부가 의지할 곳이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둘째 아들이 병들어 누워 있다 하는데, 약물로 돕고자 하니 병세의 경중을 인편으로 알려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옛적 퇴지(退之 한유(韓愈))와 번종사(樊宗師)는 맹동야(孟東野)의 상을 치르고 그 집안 사람들을 돌보아주었습니다. 하물며 이 벗은 비명에 죽은 데다 여든의 노모가 집에 계시니, 힘을 다해 모시는 의리는 우리들의 책임입니다. 강가에서 그의 영구를 기다렸다가 통곡하며 전송하니, 마음이 답답하고 말이 막혀 이만 줄입니다.

 

[-D001] 이직부(李直夫) : 이경여(李敬輿, 1585~1657),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직부, 호는 백강(白江)봉암(鳳巖)이다.

[-D002] 황 부윤(黃府尹) : 의주 부윤(義州府尹)을 지낸 황일호(黃一皓)를 말한다. 1641(인조19) 청나라 장수 마부대(馬夫大)가 자기 말을 의주에 두었는데, 말이 병들어 죽자 황일호가 죽였다고 의심하였다. 그 뒤 의주 사람 최효일(崔孝一)이 명나라에 망명하여 의주에 남아 있는 친족과 비밀리에 편지를 주고받다가 청나라에 발각되었는데, 황일호를 칭송하는 내용이 있었다. 이에 청나라가 차사를 보내 황일호를 관소(館所)에 잡아와 처형하였다. 仁祖實錄 19119참고로 이 편지의 수신자 이경여는 황일호와 사돈 관계이다.

[-D003] 대부(對簿) : 서면으로 조사를 받는 것을 말한다.

[-D004] 애형(哀兄) : 상을 당한 상대방을 가리키는 말로, 당시 이경여는 모친상 중이었다.[-D005] 옛적 …… 돌보아주었습니다 : 맹동야가 세상을 떠나자 번종사는 부조를 모아 맹동야를 낙양 동쪽 선친의 무덤 곁에 장사 지내주고, 한유는 그의 집에 재물을 주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五百家注昌黎文集 卷29 貞曜先生墓誌銘

 

낙전당집 제9/ 척독(尺牘)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6

 

 

李直夫

月初自墓舍聞黃府尹禍機甚重馳入洛中府尹未及到矣爲計百端事卒無幸天也天也府尹旣對簿不少撓臨刑猶不變從容笑語如常時收斂膚髮北向拜者四南向拜者再蓋辭君與親之意也已招獄吏使傳于一二知舊託以後事其所言保護老親外文敏公墓移奉于其夫人之兆生父之墓遷于所卜傍近吉宂自己尸柩合於安氏者三件事治命也出獄就死時以一封書附其軍官呈于政院知申事納密匣以進似是遺表竟不知有何辭語耳固知此友有氣義才局而亦不料精神識量有大過人者如此自愧平生知之未盡也今者其孤寡扶櫬南歸與其治命似相戾而其家謂扶餘家後山是吉地永葬後當次第大遷云則某輩不得膠守遺言以爭之勢也非負亡友也家後山果是吉兆而得大遷則善之善也凡事哀兄指敎俾孤寡有所依庇也其第二孤寢瘵云欲濟以藥物病之加減亦須因便示知如何昔退之與樊宗師經理東野之喪因恤其家況此友死於非命有八十老母在堂匍匐之義吾儕責也候其喪於江外哭以送之情隘辭蹙多小不盡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낙전당집[樂全堂集] ***

 

조선 전기 문신인 신익성의 시문집.

 

157. 활자본. 지은이가 살아 있을 때 아들 면과 최가 시 1,700여 수와 문 400여 편을 모아 10권으로 편집한 것을 1654(효종 5) 이민구 등이 다시 편집해 펴냈다. 시는 격조가 높고 속세를 떠나 유유자적하는 듯한 분위기이다. 7금강내외산제기 金剛內外山諸記유금강소기 遊金剛小記는 금강산 기행문으로, 여행일정과 당시의 풍물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 싣지 않은 시문들은 1684(숙종 10) 외손자인 김석주와 조카인 박세채 등이 낙전당귀전록 樂全堂歸田錄이라는 시문집으로 따로 간행했다.

 

*** 신익성[申翊聖] ***

 

군석(君奭), 낙전당(樂全堂), 동회거사(東淮居士), 문충(文忠)

출생 1588(선조 21) 사망1644(인조 22)

 

경력 오위도총부부총관

본관 평산(平山) 조선시대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군석(君奭), 호는 낙전당(樂全堂동회거사(東淮居士). 우참찬 신영(申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개성도사 신승서(申承緖)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신흠(申欽)이다. 어머니는 병마절도사 이제신(李濟臣)의 딸이다. 선조의 부마(駙馬)이다.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다. 병자호란 때의 척화오신(斥和五臣)의 한 사람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임진왜란 때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올랐으며 1606(선조 39)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이 되었다.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다가 추방되어 쫓겨났다.

 

1623(인조 1) 인조반정 후 재등용되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명으로 3()을 호위(扈衛)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세자를 모시고 전주로 피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인조를 호종하여 끝까지 성을 지켜 청군과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주화파(主和派) 대신들이 세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자고 하자, 칼을 뽑아 대신들을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호종의 공으로 재상과 같은 예우를 받고, 1638년에는 오위도총부도총관을 제수했으나 사퇴하였다. 화의가 성립된 뒤 삼전도비사자관(三田渡碑寫字官)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거부, 사퇴하였다.

 

1642년 명나라와 밀무역을 하다 청나라로 잡혀간 선천부사 이계(李烓)가 조선이 명나라를 지지하고 청나라를 배척한다고 고하여, 최명길(崔鳴吉김상헌(金尙憲이경여(李敬輿) 등과 함께 심양(瀋陽)에 붙잡혀가 억류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주선으로 풀려나와 귀국한 뒤 시·서로써 세월을 보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술활동

 

문장··서에 뛰어났으며, 특히 김상용(金尙容)과 더불어 전서의 대가였다.

 

글씨로는 회양의 청허당휴정대사비(淸虛堂休靜大師碑), 광주(廣州)영창대군의비(永昌大君碑), 파주의 율곡이이비(栗谷李珥碑)등이 있다.

 

저서로는 낙전당집樂全堂集)·낙전당귀전록(樂全堂歸田錄)·청백당일기(靑白堂日記)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