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군도(君道)

Abigail Abigail 2019. 6. 8. 14:52

군도(君道)

    

서경(書經)에서 말하기를, “황천(皇天)은 친한 이가 없어서 덕이 있는 사람을 도와주며, 민심(民心)은 일정함이 없어서 은혜를 베푸는 사람을 그리워하니, 선을 하는 것이 같지 않지만 똑같이 다스려지게 되고, 악을 하는 것이 같지 않지만 똑같이 어지럽게 된다.” 하였다.

 

세종은 배우는 것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아서 매일 편전(便殿)에 임어하여 일을 보고, 물러나 경연에 나아갔다. 세종 때에 대학연의를 강하였는데, 경연관 이지강(李之綱)이 아뢰기를, “인군의 학문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근본이 됩니다. 인군의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는 백관(百官)이 바르게 되고, 백관이 바르게 된 뒤에 만민(萬民)이 바르게 되는데, 마음을 바르게 하는 요체는 오로지 이 책에 있습니다.” 하였다.상이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상중(喪中)에 있어서 오랫동안 경연에 나아가지 못했다. 만약 후세의 어린 인군이 이를 보고서 본받아 즉위하고 3년이 지나도록 책을 읽지 않는다면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하고, 마침내 경연을 열었다. 상이 경연에 나아갔는데, 탁신(卓愼)이 아뢰기를, “신은, 전하께서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계속 읽어 한밤중이 되어서야 주무신다고 들었는데, 전하께서는 이 마음을 지키시어 게을리 하지 마소서. 사람 마음은 일정하지 않아서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없어지니, 정사를 처리하고 학문하는 것 이외에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총명이 날마다 넓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매우 공경하면서 받아들였다. 상이 경연에 나아가 좌우에게 이르기를, “내가 경사(經史)에 대하여 두루 읽어 보지 않은 것이 없다. 지금은 늙어서 잘 기억하지 못하므로 굳이 독서할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중지하지 않는 것은 다만 책을 펴 보는 사이에도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로써 본다면 독서가 어찌 유익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문종 때에 사헌부가 상소하기를, “군주가 좋아하고 숭상하는 것은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되니, 하나라도 숭상하는 것이 있으면 사악한 무리들이 그것을 따라서 합니다. 군주를 미혹시켜 나라를 망치게 하는 간신(姦臣)들이 없었던 적은 없었지만, 군주가 바르게 지키고 매우 엄하게 막았기 때문에 드러나지 못한 것뿐입니다. 조금이라도 기회를 만나기만 하면 그 틈을 타고 경쟁적으로 나와 점점 빠져 들게 하여 군주로 하여금 좋아하고 심취하여 마음과 뜻이 방탕하게 되도록 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술수 속에 빠지도록 만듭니다. 이와 같은 자들이 한번 나와서 물리칠 수 없고 한번 들어와서 쫓아낼 수 없게 되면, 못하는 짓이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으면 그만두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그 원인을 따져 보면, 군주가 좋아하고 숭상하는 것을 조금 소홀히 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니, 삼가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바른 사람은 서로 뜻이 합치되기가 어렵고 사악한 무리들은 친하기가 쉬우며, 예모(禮貌)가 장엄하면 보기를 꺼려하고, 의논이 꼿꼿하면 듣기 싫어하는 법입니다. 한 번 웃고 찡그리는 것과 한 번 주고 빼앗는 것을 우리 군주로 하여금 모두 사사로이 하지 못하게 하는데, 저 소인들은 우리 군주의 의향만 받들어 따르되 또한 지극하게 하지 못할까를 걱정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큰일을 할 수 있는 떳떳한 덕을 변치 않고 지킬 인군이 아니면 그들에게 넘어가지 않을 군주가 적습니다.” 하였다.

 

성종(成宗)이 문소전(文昭殿)에서 친히 제사드리고 돌아와 경연에 임어하여 이르기를, “나는 하루도 아까우니, 재계하는 날에는 어쩔 수 없지만 제사드린 뒤에는 정지할 수 없다.” 하였다. 문소전에서 친히 제사드리고 재궁(齋宮)에 나아가 종재(宗宰)들을 불러서 음복(飮福)하였는데, 정인지(鄭麟趾)가 아뢰기를, “세종은 일찍이 모화관(慕華館)에 행차했다가 날이 저문 뒤에 환궁(還宮)하였지만, 즉시 경연에 나아가 강목(綱目)을 백 번이나 읽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도 강목을 강하고 계시니, 반드시 세종을 본받으소서.” 하니, 상이 환궁하여 경연에 나아갔다.

 

 

선조 때에 부제학 이이(李珥)가 경연에서 아뢰기를, “전하께서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나는 학문하고자 하나 일이 많기 때문에 겨를이 없다.’라고 하셨다는 말을 일찍이 들었는데, 참으로 이런 말을 하셨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신은 이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웠습니다. 기뻤던 것은 성상이 학문하는 데에 뜻을 둔 것이었고, 걱정스러웠던 것은 상이 학문의 이치를 잘 살펴 알지 못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학문은 꼿꼿하게 단정히 앉아서 종일 독서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일상생활의 일을 처리하는 데에 있어서 이치에 맞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치에 맞는가의 여부를 스스로 알 수 없기 때문에 독서하여 이치를 구하는 것입니다. 만약 독서하는 것만 학문으로 여긴다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일상생활하는 데에 뿌리를 두어서 일마다 이치에 맞게 되기를 구한다면 하나하나의 정사와 명령이 모두 바른 데에서 나올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성상의 학문입니다. 상께서는 바탕이 아름답고 욕심이 적으시니, 학문을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첨정(僉正) 성혼(成渾)이 상소하기를, “인군이 즉위하신 초기에는 평범한 군주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현자를 구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 뜻을 두어 약간 청명(淸明)한 듯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학문에 힘을 쏟지 않으면 중년 이후에 기욕(嗜欲)이 많아져서 충직한 이들이 점점 멀어지고, 어지럽고 화려하게 성색(聲色)을 즐김으로 인하여 그 지기(志氣)가 녹아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에는 현명했는데 나중에는 혼매하게 되어 마치 두 사람인 것처럼 된 경우가 많습니다. 신은 사서(史書)를 읽을 때마다 송()나라 이종(理宗)에 대해 탄식하고 한탄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인조 때에 상이 당시의 처방에 따라 정전(正殿)을 피한 채 자정전(資政殿) 처마 밑에 임어하여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약원(藥院)이 날씨가 너무 무더운 것 때문에 경연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학문의 도는 촌음(寸陰)도 아껴야 하니, 어떻게 날이 덥다고 하여 강하는 것을 정지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듣지 않았다.

 

인조(仁祖) 때에 헌납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척족들이 정사에 간여하는 것은 지난날의 고질적인 폐단이었습니다. 지금은 즉위하신 처음이니 의당 높은 벼슬을 주는 폐단을 경계해야 되는데, 일전에 홍희(洪熹)는 척족으로서 수령에 임명되었으니, 조짐을 길러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후회한다.” 하고, 마침내 그 명을 중지하였다. 효종 때에 고상(故相) 이경여(李敬輿)가 재이(災異)를 인하여 상소하기를, “형식적인 예의를 조금 갖추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방도가 아닙니다. 신이 생각건대, 피전(避殿)하는 것은 궁궐을 엄하게 지켜 사사로이 통하는 것을 막는 것만 못하며, 감선(減膳)하는 것은 검소한 덕을 숭상하여 낭비하는 것을 절약하는 것만 못하고, 해마다 구언(求言)의 교지를 내리는 것은 한 가지 일을 실제로 행하는 것만 못하며, 조회에 임하여 애통해하는 것은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현종(顯宗) 때에 대학연의를 강하였는데, 이조 판서 송준길(宋浚吉)이 아뢰기를, “성의(誠意) 이하의 공부는 의당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참고해서 보아야 하니, 심체(心體)가 바루어진 뒤에 격물치지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격물치지를 하면서 뜻을 성실하게 하지 않는다면 격물치지를 하여서 어디에다 쓰겠는가.” 하였다.

 

영종(英宗) 때에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를 강하였는데, 상이 정색(正色)하면서 이르기를, “() 좌상 이집(李㙫)이 나에게 이 책을 강하라고 권하였고, 고상(故相) 홍치중(洪致中)과 조문명(趙文命)도 그렇게 말하였으니, 그 뜻은 아마도 내 도량이 좁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하여 간언을 받아들이는 도량을 개발시키려고 해서였을 것이다. 옛날에 여조겸(呂祖謙)은 일개 학문하는 사람에 불과했는데도 논어(論語)를 통하여 그의 기질을 변화시켰다. 내가 이 책을 읽고도 나의 도량을 넓히지 않는다면 어찌 다만 이 책을 저버릴 뿐이겠는가. 또한 세 정승을 저버리는 것이다.” 하고, 마침내 직접 윤음(綸音)을 지어서 의정부에 명하여 직언(直言)을 구하게 하고, 예조로 하여금 세 정승에게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유월(六月)에 날씨가 매우 무더웠는데도 상은 강학하는 것을 중지하지 않고 야고(夜鼓)를 네 번 치고 나서야 파하였다. 대신이 정신을 너무 썼다고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인주(人主)의 한 마음은 만화(萬化)의 근본이니, 어떻게 날이 무덥다고 해서 게을리 할 수 있겠는가. 조종조(祖宗朝)에는 필시 이렇게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승지 이성중(李成中)에게 고사(故事)를 찾아보게 하였는데, 한창 무더울 때에 개강한 경우는 찾지 못했지만 혹한에 개강한 경우는 있었으니, 추위와 더위가 무슨 차이가 있는가. 더구나 한 달에 여섯 번이나 면대하였으니, 더욱 조종(祖宗)이 정사하는 데에 근면했던 뜻을 볼 수 있다.” 하였다.

 

 

임하필기(林下筆記) 9/ 전모편(典謨編) 군도(君道)에서

 

임하필기(林下筆記): 한말의 문신 이유원(李裕元 : 1814~88)이 쓴 수록류를 모아 엮은 책. 39.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틈틈이 써놓았던 것을 흥선대원군에게 밀려나 있던 1871(고종 8) 우거지인 천마산 가오곡 임하에서 책으로 묶은 것. 9·10 전모편 典謨編은 임금과 신하의 도리, 현인을 구해 쓰는 법, 백성을 교화하는 문제 등 천하를 경영하는 대도를 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