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덕(德)과 의(義)로움을 기르라
숨은 덕(德)과 의(義)로움을 기르라
“영화로운 이름을 세우는 것은 숨은 덕(德)을 심는 것과 같지 못하다[立榮名 不始種隱德.(입영명 부시종은덕.)] 권세 있는 무리와 사리(私利)를 탐하는 무리에게는 발걸음을 하지 말 것이니, 한번 발을 들여 놓으면 그 더러움이 평생에 드리울 것이다[權門私竇 不可著脚 一著則點汚終身,(권문사두 불가저각 일저즉점오종신.)].”<菜根譚(채근담)>.
명예를 얻어 세상에 이름을 떨치기 보다는 남에게 보이지 않는 덕(德)을 베푸는 것이 낫다. 외부로 이름을 내는 것은 마음의 부담으로 남는 것이요 남에게 보이지 않는 덕을 베푸는 것은 그 마음에 평안과 즐거움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인격자는 출세하여 공명(功名)을 떨치기 보다는 오히려 숨어서 덕을 심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의(義)롭지 못한 권세와 재물을 탐하거나 누리는 자들을 가까이 하지 말 것이니, 한번이라도 가까이 하고 나면 그 더러움이 물들어서 죽고 난 이후까지 그 더러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후손들에게도 치욕(恥辱)으로 남게 된다.
오늘날 이 시대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참으로 이러한 고결한 품격의 인격자를 찾아보기가 어려워 대단히 유감인데, 350년 전을 살고가신 서하 이민서(李敏敍) 선생의 졸기에서 이런 고결한 인격과 일생을 찾아볼 수가 있어 우리 후손들이 모범로 삼을 만하다.
숙종 14년(1688년) 2월2일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서하 이민서(李敏敍)의 졸기(卒記)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이민서(李敏敍)가 졸(卒)하였는데, 나이 56세였다. 이민서는 고(故)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의 아들인데, 성품이 강명(剛明) 방정(方正)하고, 간묵(簡默) 정직(正直)하였으며, 조정(朝廷)에 있은 지 30년에 여러 번 사변(事變)을 겪었으나 지조(志操)가 한결같았고, 직위(職位)가 총재(冢宰)에 이르렀으나 문정(門庭)은 쓸쓸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으며, 한결같이 청백(淸白)한 절개는 처음에서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문장(文章) 또한 고상하고 건아(健雅)하여 온 세상의 추앙(推仰)을 받는 바가 되어, 국가(國家)의 전책(典冊)도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매양 매복(枚卜, 정승 될 사람을 점침) 할 때를 당하면 그 당시에 의논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아무를 두고 그 누가 되랴?’ 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그의 강직(剛直)하고 방정(方正)한 것을 꺼려하여 그다지 우악(優渥)하게 총애(寵愛)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들어와 정승이 되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시대의 일에 근심이 많은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근심과 번민이 병이 되어 졸하였다. 조야(朝野)에서 슬퍼하고 애석해 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비록 평일에 서로 좋아하지 않았던 자라도 정직(正直)한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였다. 그 뒤에 문간(文簡)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영인본】 39책 121면【분류】 *인물(人物)
이에 나는 오늘날 우리나라가 참다운 선진국으로 발전하려면 반드시 국민정신문화개혁과 아울러 교육전반의 개혁을 그 근저(根底)부터 새롭게 추진하여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 구체적인 방침을 생각건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건국정신, 정직·검소·성실·사랑으로 대변되는 청교도정신, 그리고 애민(愛民)·충효·인경(仁敬)·과학으로 대변되는 세종대왕정신을 바탕으로 전 국민의 정신문화개혁과 교육개혁을 기초로 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2025. 3. 8. 素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