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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학사상과 정치 ~ 사계 김장생 선생

Abigail Abigail 2018. 8. 16. 13:30

예학사상과 정치 ~ 사계 김장생 선생

 

전통사상에서 예학(禮學)은 많은 분야를 포괄하고 있다.

넓게는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것을 꿰뚫는 원리”에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꿰뚫는 질서"를 뜻한다.

해와 달과 별들의 위치 운행에서 땅위의 산과 강과 나무와 풀들 그리고 인간 세계의 움직임과 질서들이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이처럼 예라는 것이 얼마나 넓은 뜻을 포함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우주의 운행에서 인류가 일군 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예에 속하고, 국가의 문물제도에서 개인의 생활 예절에 이르기 까지 모두 예에 속한다.

 

사계 김장생(金長生 , 1548~1631)은 이러한 예학을 연구해 일가를 이룸으로서, 조선시대 예학의 첫 문을 열어놓은 분으로 추앙받는다. 그가 팔십 평생을 쌓아올린 연구 성과를 아들(신독재 김집, 1574~1656)이 이어받아 종합하고 체계화시켰다. 충청도 연산에 살면서 공부하고 후진을 양성했기 때문에 그곳을 “예의 고을(禮鄕)”이라 일컫게 되었다. 지금도 돈암서원이 있어 옛 자취를 살펴볼 수 있다.

사계는 일관되게 예학 연구를 했지만, 그것에 바탕을 둔 경세사상도 펼쳤다.

그가 산 시대가 아주 어지럽고 전쟁의 시기였기 때문에 나라와 계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조선 13대 왕인 명종3년에 태어나 16대 왕인 인조 9년까지 83년간을 살았다.

1세기에 가까운 이 기간은 참으로 다사다난한 역사의 고비였다.

국가의 흥망과 직결되는 큰 사건이 잇달아 일어난 것이다.

임진왜란(1592년), 정묘호란(1627년)등 국운이 걸어야 했던 두 전쟁이 있었는가 하면, 인조반정(1623년), 이괄의 난(1624년)등의 정변도 있었다.

국내정치로 말하면 당쟁이 격화되어 정권을 놓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고, 국제적으로는 일본이 2백여 년의 전국시대를 청산하고 풍신수길이 전국을 통일해 호시탐탐 조선을 향해 침략의 야욕을 불태우다가 드디어 우리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참혹한 전쟁을 일으켜 전국토를 초토로 변하게 한 시기였다.

그런가 하면, 만주대륙에서는 여진족이 영웅을 만나 그 사이 축적되었던 힘을 폭발시켜 노제국명(明)을 위협하면서 조선에 대해서도 갖은 위협을 가하다가 결국 침략의 칼을 뽑아든 그런 험난한 시기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사계는 45세로 정산현감(定山縣監)에 재임하고 있었다. 정산이라는 조그만 고을(지금의충남 청양군 정산면)의 수령으로서 임진왜란을 맞게 된 그는 개인적으로 평생 동안 씻을 수 없는 한(恨 )을 얻게 되었다.

맏아들과 며느리, 장손(당시3세)등이 서울에 살고 있다가 왜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피난길에 나섰다가 망우리 고개에서 왜병을 만나 무참히 살해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우 연손(燕孫)은 경상감사인 김수(金晬)의 막하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참으로 큰 충격이었다. 전쟁 중에 그는 승진을 해서 호조정랑이 되어 재정을 맡아보고, 정유재란 때는 구원병으로 온 명군의 군량 조달을 책임지고 동분서주 했다.

청(淸)이 일어날 즈음인 정묘호란 때는 팔십 고령이었다. 여진족은 만주 대륙을 통일해 후금(뒤에 청)이라 일컫고 노제국 명나라를 치기 전에 그 배후에 있는 조선을 먼저 공격한 것이 정묘호란인데, 파죽지세로 기병을 앞세워 폭풍처럼 휘몰아쳐 왔다. 크게 당황한 임금(인조)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유지를 사계에게 내렸다.

국가가 불행하여 도적이 변방을 침범해 의주가 무너지고 선천, 정주까지 점령당하고 말았다.

만일에 도적의 예봉이 양서(황해도와 평안도)를 뚫고 깊이 배안(腹內)으로 들어온다면 회복할 발판은 오직 남방밖에 없다. 국난을 걱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경을 호소사로 삼아 인신(印信)을 내려 보내니 경은 의병을 규합해서 국가의 어려움에 모두 궐기하도록 지휘하기 바란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극한 위기에 처하게 되자, 임금은 초야에 묻혀 있는 늙은 선비를 생각해낸 것이었다.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어 그의 한마디 말이라면 젊은이들이 기꺼이 목숨을 던져 나라에 보답할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사계는 임금의 부름을 받잡고 팔십 노구를 이끌고 양호호소사로 활약하게 된다.

양호(湖西, 湖南)지방을 돌며 군사와 군량미를 모으며 후방에서 전의를 고무 격려하는 직무였다.

 

이보다 앞서 인조는 반정이 성공해 왕위에 나아가자“김장생은 내가 오래전부터 그 이름을 익히 듣고 있다” 하면서 벼슬을 내려 불렀고, 사계는 사양을 거듭하다가 이듬해 ‘열세 가지를 말씀드리는 글(陳 十三事疎)’을 올려 그의 경륜을 펴 보였다.

(1) 큰 뿌리를 세울것(立大本). 큰 뿌리는 무엇인가. 마음이다. 정치하는 사람은 먼저 마음을 바르게 지녀야 한다.

(2) 앞서의 잘된 정치를 본받아 실현 시킬 것(恢舊業). 어제는 오늘의 거울이다. 지나간 역사에서 모범을 찾아 잘못된 것은 경계로 삼고 잘된 정치는 오늘에 다시 재현 할 수 있어야한다.

(3) 홍범을 높여 따를 것(尊洪範). ‘홍범’이란 상고시대에 기자가 전한 큰 법을 말한다. 사람 이 사는 도리, 정치하는 대경(大經)이 적혀있다. <서경>에 인용되어 있는데, 역사적으로 동양 정치사상의 줄기를 이루어왔다.

(4) 청소년 교육을 강화 할 것(講小學). 청소년은 나라의 미래다. 교재로 쓰이고 있는 <소학>을 널리 보급해서 한층 강화해야한다.

(5) 효도를 다 할 것(盡聖孝). 임금이 먼저 효도의 본보기를 보여 온 나라 사람이 본받도록 해야 한다.

(6) 제사를 경건하게 받들도록 할 것(敬祀典).

(7) 친족을 소중이 여기고 서로 친하게 지내도록 할 것(親九族). 부모공경과 자식사랑은 가족사이의 화목이고 이를 더욱 확대시켜 일가친척들과 화합을 이룩해야 하고, 더 나아 가 사회와 국가로 그 사랑을 확충해야 한다.

(8) 임금은 신하와 백성의 자리에 서서 그들의 처지를 보살필 것(體群臣).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처럼 처지를 바꿔 생각할 수 있어야 아랫사람의 가려운 곳을 정확히 짚어서 긁어 줄 수 있다.

(9) 몸소 낱낱이 듣고 보고 해서 결정을 내릴 것(親聽政). 정치는 하나하나 신중히 결정해나가는 과정으로 이뤄져야 한다.

(10) 민폐를 없앨 것(革民弊). 당시 미증유의 전란으로 국토가 초토화되어 경제 사정이 극도로 피폐되어 있었고, 벼슬아치의 기강이 무너져 잔약한 백성은 의지할 곳 없이 수탈과 착취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에 그는,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그들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습니다. 옛날부터 정부에서 농민들로부터는 절대로 털끝만한 수탈도 없었습니다. 진실로 나라의 근본이 중하다는 것을 알고서, 그 하늘로 삼는 바를 잃지 않도록 한 것 입니다.”라고 강변했다. 곧 ‘백성이 나라의 근본(民惟邦本)’임을 깨우쳐주고, 백성은 ‘먹 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以食爲天)’는 것을 강조한다. 백성을 위하는 정치, 경제 성장을 도모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

(11) 선혜청을 폐지할 것(罷宣惠廳). 당시 대동법 시행에 따라 세금을 거두는 일을 맡은 관청이 선혜청이다. 이를 없애라는 것이다. 백성의 원망을 사고 있었던 것이다.

(12) 군사행정을 정비할 것(修軍政). 군정은 국가 방위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데, 전쟁 후 기강이 해이해져 병적 정리도 되지 않고 군비도 엉망이었다.

(13) 대궐을 지키는 경호원들의 기강을 세우고 수비를 엄히 할 것(嚴宮衛).

이 13개조의 정책 건의에 인조는 가납한다는 비답을 내리고 즉시 실천할 것을 약속 했다.

 

우주와 인간의 질서를 바로잡는 예학을 깊이 연구한 그는 정치에서도 탁월한 견식을 폈고, 팔십 평생 나라 일을 걱정해 자주 현장에 나서곤 했다.

 

위의 사계 선생이 건의한 말씀에서 특히 오늘날의 세태에 마음에 와 닫는 것은 "청소년 교육을 강화하자"는 말씀이다.

사계선생이 살아가던 시대보다 오늘날은 더욱 다양한 갖가지 문화가 어울려져 가치관이 혼탁하고 갈피를 잡기 어려운 시대이다. 진리에 터를 둔 바른 가르침과 인도만이 앞으로 밝은 인류의 미래를 열어갈 수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생활환경인 인성(人性)이 혼탁하고 거칠은 것은 바로 기초 즉 유아 청소년 교육을 등한히 하여 확고한 인격형성의 바탕을 뿌리내리지 못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특히 정직한 생활의 습관이 어릴 때 이미 몸에 배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들을 보다 넓은 세계적 안목에서 연구 터득하고 실천, 전파하여 가야할 것이며, 이는 사계선생의 의도하신 살기 좋은 문화와 예절의 나라 건설을 향하는 길이다.

 

2018. 8.16. 이 주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