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선생(大人先生)
대인선생(大人先生)
임금이 신하를 지칭하여 ‘대인선생(大人先生)’이라고 부른 것은 만고에 보기 드문 일일 것이다.
그런데 효종대왕이 백강 이경여(李敬輿) 선생을 지칭하여 ‘대인선생(大人先生)’이라고 한 사실이 있으니 이는 1707년(숙종 33년) 8월 8일에 소재 이이명 선생의 상소문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참으로 백강 선생도 인품도 훌륭하셨지만 효종대왕의 큰 도량과 덕성이 돋보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제가(이이명이) 동궁께 ‘신의 할아비 이경여(李敬輿)는 효묘(孝廟)께 어수지계(魚水之契)가 있어 일찍이 지극히 원통함이 마음에 있다는 하교가 있었으며, 또「대인선생(大人先生)」이라고 일컬으셨으니, 단지 신의 집안 자손만이 영광으로 느낄 뿐만이 아닙니다. 이는 황분제전(皇墳帝典)1) 과 함께 천지에 빛나는 것이니, 저하(邸下)께서도 또한 이 의리를 일찍 아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등본(謄本)을 올리고자 하오니 써서 내려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하자, 동궁께서 즉시 올리라고 명하시므로 신이 소매 속에서 꺼내어 올렸습니다. 대개 우리 효묘께서 비록 큰 뜻을 품으시기는 하였지만, 밀물(密勿)한 유위(猷爲)2) 외에는 일찍이 문자로써 아랫사람에게 조유(詔諭)하신 적이 없었고, 말년에 와서야 이 하교가 신의 할아비에게 비로소 미쳤던 것입니다. ··· 문정공(文正公) 신(臣) 송시열(宋時烈)이 일찍이 신의 할아비의 묘지명(墓誌銘)에 이르기를, ‘「지극히 원통함이 마음에 있다.」는 하교를 유독 백강공(白江公)에게만 명백하게 말씀하셨으니, 어찌 성문(聖門)3) 의 3천 명 제자 가운데 유독 단목씨(端木氏) 자공(子貢)만이 다른 사람이 듣지 못했던 것을 들었던 경우와 같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또 일찍이 ‘지극히 원통함이 마음에 있는데,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至痛在心日暮途遠]’란 여덟 글자를 크게 쓰고 그 아래에 쓰기를, ‘위는 우리 효종 대왕께서 백강(白江) 이상국(李相國)에게 내린 비사(批辭)인데, 원래의 비사에서는 이상국을 대인선생이라고 일컬었다.’고 하였습니다. ··· 신이 이에 온 집안과 계획하여 송시열의 글씨를 모탑(模榻)하여 신의 할아비가 일찍이 거처하던 부여현(扶餘縣) 백마강(白馬江) 위의 서실(書室) 동쪽 바위에다 새겼습니다. 그런데 신의 어리석은 뜻으로는 ‘성조(聖祖)의 의리는 우주를 버틸 수 있고 군신(君臣)의 제우(際遇)가 또한 고금에 크게 뛰어나니, 단지 사가(私家)의 영총(榮寵)일 뿐만이 아니다. 천추(千秋)의 지사(志士)로 하여금 당일의 의리에 느낌을 갖게 할 수 있을 것이다.’고 여겼습니다.』<1707년(숙종 33년) 8월 8일에 소재 이이명 선생의 상소문에서>
[註 1]황분 제전(皇墳帝典) : 삼황(三皇)의 삼분서(三墳書)를 이름.
[註 2]유위(猷爲) : 계획.
[註 3]성문(聖門) : 공자의 문하.
소재 이이명 선생이 백마강(白馬江) 위의 서실(書室) 동쪽 바위에다 새겼던 것이 지금도 문화유적으로 남아있는 ‘대재각(大哉閣) 각서석(刻書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