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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욕(私慾)을 잘 이긴다면(我私能克)

Abigail Abigail 2022. 6. 18. 11:15

사욕(私慾)을 잘 이긴다면(我私能克)

 

성인(聖人)은 자신을 뒤에 머물게 함으로 앞서고, 떠나 잊으므로 자신이 존재하게 된다.

시이성인(是以聖人) 후기신이신선(後其身而身先), 외기신이신존(外其身而身存)

그것은 사사로운 욕심이 없기 때문이며, 그러함으로 자신을 이룰 수 있다.

비이기무사사(非以其無私邪), 고능성기사(故能成其私)

 

<노자(老子) 제7장에서>

 

마태복음 4장1-1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우리들의 힘인 부(富), 명예, 권력, 등을 사용하라고 유혹하는 악마를 이기고 사욕을 극복하였다. 권력과 재물과 명예 따위는 추구하면 할수록 허무함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우리는 숱한 경험과 역사를 통하여 알고 있다. 이를 알면서도 우리는 매번 이것들에게 굴복하고 만다.

 

유혹자는 달콤한 거짓말로 우리들의 욕심을 자극하며 인간을 유혹한다. 때로는 성경을 인용하면서(마태복음 4장6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혹한다. 유혹에 일단 넘어가면 올가미에 걸려든 사슴처럼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고 따라 다니게 되지만(잠언 7장21-23절) 인간은 쉽게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유혹은 인간의 힘이나 의지가 아니라 성령(Holy Spirit)의 힘에 자신을 맡길 때 극복할 수 있다.

 

성령이 예수님을 인도한 곳은 다름 아닌 광야였다. 광야는 인간이 자신의 무력을 체험하는 장소이다.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자신을 온전히 맡긴 채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분만을 섬기는 힘을 얻게 된다 (마태복음 4장10절). 우리의 사사로운 욕심을 자극하는 유혹에 대한 승리는 성령 안에서의 무력(無力)과 비폭력의 승리이다.

 

예수님이 받은 첫 번째 유혹은 돌을 빵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다. 크리스천 작가 헨리 나우웬(Henry Nouwen)은 폐루의 리마 외곽에 있는 빈민가의 어린이들이 오염된 물과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빵에 대한 유혹이 얼마나 물리치기 힘든지 설명해주고 있다. 먼지로 뒤덮인 거리에서 사람들이 돌을 빵으로 변화시키고, 더러운 물을 맛있는 우유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돌을 빵으로 변화시키는 아들로서의 능력을 증명하라고 요구 받았을 때 말씀을 선포해야하는 사명감으로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말씀하였다.

 

두 번째 유혹은 성벽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이다. “성벽에서 뛰어내려라. 그리고 천사들이 손으로 받들어 다치지 않게 하라”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묘기를 보이지 아니하였다. “예수님은 스턴트맨이 되는 것을 거부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증거 하기위해 오시지 않았다. 뜨거운 석탄 위 혹은 불길 위를 걷거나 사자의 입에 손을 넣어 무언가 그럴듯한 일을 할 수 있음을 과시하러 오시지 않았다 (Henry Nouwen)" 혹시 그런 기적을 행하였어도 유혹하는 자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만을 볼뿐 거기서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볼 리 만무하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따라서 그분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하나님을 떠보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이라도 된 듯 영웅주의에 빠지는 것도 경계하여야한다. 하나님마저 자기 힘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듯이 하나님을 협박하며 기도하는 사람을 종종 본다. 그런가하면 자기능력에 도취되어 스스로 하나님을 움직이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장담하며 행동하는 사람도 많이 본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기적 영웅적인 유혹을 이기셨다. 성취감으로 가득 차있고 인기와 명예를 쫒는 몸으로는 진리를 사랑할 수 없다. (이제민, “수동의 영성, 제3의 인생”중에서)

 

세 번째 유혹은 권력에 대한 것이다. “이 세상 모든 나라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다.”라고 유혹하는 자는 말한다. 물론 예수님은 거절하였다. 그분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 섬기라”라고 말하였다. 우리교회의 리더들 중 많은 이들은 어떠한가? 괜한 권위의식으로 목에 힘을 주고, 신자들이 자기의 지도에 따르지 않는다고 안달하고, 일일이 지시하며 무조건 따라 주기를 바라고, 고자세로 신자들을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이 필요하다.

 

진정한 지도자라면 힘(권위)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어야한다. 더 나아가 자신도 지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한다. 남을 올바르게 지도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자신도 남의 지도에 맡길 줄 알아야한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가 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듣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수동의 영성을 포기한 능동은 권위주의의 본산이다. 때때로 교회가 권위주의적이라고 비판 받는다면 이는 수동의 영성을 살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힘을 키울 것이 아니라 능력을 비우는 수동의 영성을 배워야한다.

 

그리스도교 역사의 가장 큰 모순중 하나는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권력의 유혹에 굴복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인 권력에 천착(穿鑿)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고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었다. 권력을 복음 선포를 위한 도구로 간주하려는 유혹이 그 무엇보다도 가장 큰 유혹이다.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또한 우리까지도 말하기를, 권력이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에게 봉사하는데 쓰일 수 있다면 좋은 일 이라고 말이다. 이러한 합리화 때문에 십자군이 일어났다. 종교재판소가 생겨났고 인디언들은 노예가 되었다.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자리를 바라게 되었고 찬란한 대성당, 대형교회들이 세워졌으며, 양심에 거스르는 윤리적 조작들이 일어났다.

 

“교회역사의 주요위기들, 11세기의 교회분열, 16세기의 종교개혁, 20세기이후 거대한 세속화 등 매 위기를 들여다 볼 때마다 우리는 부패의 주요원인이 힘없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내세우는 사람들이 행사한 권력이었음을 항상 발견한다. 권력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기 보다는 사람을 지배하려고 하고, 생명을 사랑하기보다는 생명을 소유하려고 한다.”(Henry Nouwen)

 

우리는 끊임없이 유혹을 받는다. 강한 것, 큰 것, 일류, 최고만을 선호하는 세상이 우리를 유혹한다. 그러나 이 유혹을 이겨내고, 작고 보잘것없는 것도 하나님의 피조물로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우치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희망이다. 무소불위의 권력보다 사랑이 강하며, 어떤 첨단의 무기보다도 십자가가 강하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약할 때 우리가 강할 수 있다”라고 고백한다.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하고자할 때 나는 한없이 무력하고 약하지만, 내 의지 내 힘을 내려놓을 때 나는 무엇보다도 강하여진다.

 

옛날 주 부자(주희)는 / 昔朱夫子

송 나라가 망할 때를 당해 / 際宋陸沈

임금에게 진계한 것이 / 其所進戒

가장 은미한 것이었습니다 / 屋漏之微

사욕(私慾)을 잘 이긴다면 / 我私能克

무슨 일이든 쉽게 성취될 것입니다 / 事無足爲

 

<백강 이경여 선생이 효종대왕에게 한 말씀>

 

2022. 6.18. 素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