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참판(李參判) 용원(容元) 에게 보냄 ~ 면암 최익현 선생
이 참판(李參判) 용원(容元) 에게 보냄 ~ 면암 최익현 선생
신묘년(1891, 고종28) 3월 13일
절하고 문병(門屛)을 물러 나온 지 거의 30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의 많은 사연은 이루 다 번거롭게 말씀드릴 겨를이 없습니다. 요사이 조카 편으로 영감의 소사(疏辭)를 읽었는데, 의리가 정대하고 논의가 명쾌하였습니다. 백강(白江)과 포ㆍ소(圃疏) 여러 선생이 윤리와 기강을 부식하신 공효가 이제 위대한데 영공의 오늘날 계술(繼述)하시는 것이 대단히 중대하게 관련되었으니, 아, 얼마나 장하신 일입니까.
영지(靈芝)도 뿌리가 있고 예천(醴泉)도 근원이 있습니다. 충성스럽고 의로운 사람은 반드시 충성스럽고 의로운 집안에서 나는 것이니, 시인(詩人)이 경사 황보(卿士皇父)를 칭송하면서 반드시 남중 태조(南仲太祖)를 말한 것은 어찌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견ㆍ양(犬羊)이 횡행하고 의리가 날로 상실되어 백성과 나라의 걱정이 한두 가지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의상(衣裳) 따위도 장차 모두 오랑캐로 귀결됨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공의 오늘 행차는 또한 성주(聖主)께서 한 구역의 깨끗한 땅을 주시어 몸을 결백하게 하여 더럽히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못 하늘이 현인을 옥으로 만들려는 뜻이니, 서산(西山)의 각혈(脚血)은 하례할 만한 것이며, 위로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곤궁한 속에 질병으로 폐인이 되어 발이 있어도 붙잡아 맨 것 같아서, 정안(淨安)으로 달려가 마음대로 작별하지 못하니, 남몰래 자복(子服 노 나라 대부 자복경백(自服景伯))의 눈물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옛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하고 잘되고 안 되는 것은 성현도 기필하지 못하니, 내가 어찌 구차하게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원하건대, 명공은 한가한 시일을 얻었을 때에 더욱 주ㆍ송(朱宋 주자와 송자(宋子), 송자는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킴)의 글을 읽어 스스로 의리의 본원을 함양하시면 모든 사변에 대응하여 나갈 때에 응당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영감의 의향은 어떻습니까? 미치광이의 참람됨이 여기에 미쳤으니 죄송합니다.
삼가 이에 조카를 보내어 이후의 동정을 탐지하오며, 존체 보중하시어 여망(輿望)에 부응하시기를 빕니다.
[주-D001] 백강(白江)과 포ㆍ소(圃疏) : 백강은 이경여(李敬輿)의 호, 포는 한포재(寒圃齋) 이건명(李健命), 소는 소재(疏齋) 이이명(李頤命)을 가리키는데 모두 이용원의 선조이다.
[주-D002] 시인(詩人)이 …… 말한 것 : 경사는 관명으로 육경(六卿)을 이르며, 황보는 이름이다. 그는 주 선왕(周宣王) 때 사람으로 공이 있는 남중(南仲)이 시조였다. 선왕이 회북(淮北)의 오랑캐를 토벌할 때 경사 황보를 명하면서 그의 선조 남중 태조를 일컬은 것은 세공(世功)을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왕이 경사를 명하니 남중이 태조인 태사 황보라.[王命卿士 南仲大祖 大師皇父]” 하였다. 《詩經 大雅 常武》
[주-D003] 서산(西山)의 각혈(脚血) : 서산은 송 나라 학자 채원정(蔡元定)의 호. 그가 위학(僞學)으로 몰려 도주(道州)로 귀양 갈 때 그의 아들 침(沈)과 함께 지팡이를 짚고 나막신을 끌고 2천 리를 가자 발에서 피가 났는데, 그는 조금도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면암집(勉菴集) 면암 최익현(崔益鉉)선생 문집 제7권 書
ⓒ 한국고전번역원 | 남만성 유세희 이종술 (공역) | 1978